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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Sep 17. 2015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여자는…

지친 하루였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여자는 무거운 몸을 간신히 책상 앞에 앉힌다. 지친 하루였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커피포트에 불을 켜고 책과 노트를 편다. 머릿속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펜은 하릴없이 같은 문장 아래를 오가며 몇 겹의 실타래를 만든다. 커피믹스 하나를 뜯고 열이 올라 불이 꺼진 커피포트의 물을 컵에 따른다. 커피가 식길 기다리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긴다.

언제 잠이 든 걸까. 턱을 받친 왼손이 흔들리며 여자는 잠에서 깼다. 툭- 오른손이 커피가 든 잔을 쳤다.

급히 컵을 세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뒤였다. 책과 노트가 갈색으로 변했다. 놀라 일어난 여자는 휴지를 찾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커피는 계속해서 책상 위를 흐른다. 되는대로 물건들을 바깥쪽으로 밀어낸다. 다시 한번 툭- 쌓여있던 책이 무너지며 포트기를 넘어뜨린다. 책상 위에 또 하나의 물줄기가 터졌다.

여자는 의자에 주저앉는다. 양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리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옅은 갈색을 풀어헤치며 투명한 물이 책상 위를 빠르게 흘렀고, 그 위에 다시 몇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방 가득 낱장으로 뜯어진 노트와 몇 권의 책이 펼쳐졌다. 책상 위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필기구 몇 자루만 가지런히 놓였다. 여자는 바닥에 앉아 한 손에 드라이기를 들고 한 장 한 장 젖은 노트와 책을 말린다. 많이 번지긴 했지만 못 쓸 정도는 아니다. 잘 말려서 정리하면 다시 쓸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

짧은 시곗바늘이 어느덧 3을 가리켰다. 고요 속에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간이다. 창밖은 저렇게 어두운데 모두가 잠든 이때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희뿌옇다. 노트 위에 번진 문장처럼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형태를 알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을 것 같다. 불을 끄면 이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릴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적막한 새벽, 드라이기 소리만이 여자의 방안을 울린다.


2010.07.01.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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