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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Jul 09. 2017

오늘은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

아무리 취해도 잠이 오지 않아.

오늘은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 나뒹구는 맥주 캔만 늘고 있어. 아무리 취해도 잠이 오지 않아. 어떻게 하라고. 새벽이잖아. 마음껏 소리칠 수도 없어. 전화기에서 지운 네 번호가 왜 술만 마시면 또렷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어. 그날 네가 울었던가. 난 울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날도 난 글을 썼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어. 어처구니없지. 실감이 안 났던 걸까. 오히려 그날 평소보다 글이 잘 써졌다면 넌 믿을까. 아주 익숙한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처럼 난 키보드를 두드렸어. 그날도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어.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평소보다 늦게 잠든 어느 날, 난 죽은 듯 긴 잠을 잤어.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뒤척이는 일 한번 없는 깊은 잠이었어. 서너 장의 페이지를 한꺼번에 넘긴 듯 시간이 뭉텅이로 넘어갔어. 잠에서 깼을 땐 저녁이었어. 습관처럼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떠지지 않는 눈을 비볐어. 문서 폴더로 들어가 잠들기 전까지 썼던 글을 클릭해 열었어. 마우스 휠을 돌리며 글을 읽던 난, 내가 아직 잠에서 덜 깬 줄 알았어. 쓰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글이 적혀있는 거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그날 썼던 부분부터 다시 읽다 가야 깨달았어. 그건 너에 대한 글이었어. 난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어. 거기엔 내가 알고 있던 너, 내가 기억하는 네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어.

정신을 차렸을 때, 노트북은 모니터가 깨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난 책상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울고 있었어. 겁에 질린 짐승처럼 서럽게 울었어. 그날 난 먼저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네 뒷모습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그날 내가 울었던가. 넌 울지 않았던 거 같은데.


2011.04.17.30:56.
Athlete Cha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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