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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Apr 03. 2018

엄마가 깨우기 전에 눈을 떠요.

엄마는 잘하고 있다는데, 오늘도 나는 없어요.

엄마가 깨우기 전에 눈을 떠요. 그래도 조금 더 누워있고 싶어서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어요. 알람이 울리면 엄마가 방에 들어와 저를 깨워요. 씻고 나와 엄마가 꺼내놓은 옷을 입고 아침을 먹어요. 어제 챙겨놓은 가방을 메고 인사해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사 오기 전엔 엄마가 늘 데려다줬지만 전학 온 뒤론 혼자 다녀요.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서 아파트 단지만 나서면 바로 길 건너가 학교예요. 아침마다 아주머니들이 나와 계셔서 위험하지 않아요. 사실 학교에 있을 때가 제일 펀해요. 수업은 다 아는 내용이라 재미없지만 그만큼 열심히 안 해도 돼요. 그냥 적당히, 숙제만 잊지 않고 시험 때만 신경 쓰면 괜찮아요. 그래도 성실히 듣는 척은 해요. 선생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니까요. 그보다 쉬는 시간이 자주 있어서 좋아요. 점심도 친구들이랑 먹을 수 있고요. 전에 다니던 학교에선 학원 다니는 애들이 별로 없어서 혼자 학원가는 게 너무 싫었어요. 엄마는 그런 거 부러워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다들 놀러 간다고 같이 가자는데 나만 못 가니까. 처음엔 부럽기도 했지만 나중엔 미안했어요. 여긴 학원 다니는 애들이 많아서 좋아요. 어느 학원이든 같은 반 친구들이 몇 명씩은 꼭 있고, 학교 끝나고 놀자는 애들도 없으니까 부럽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에 학원 차들이 와 있어요. 처음엔 차가 너무 많아서 찾기 어려웠는데 이젠 눈 감고도 찾아 탈 수 있어요. 매일 차들이 서는 위치가 같거든요. 기사 아저씨들끼리 정해놓은 규칙이 있나 봐요. 오늘은 수학학원 갔다가 심화반만 들렸다 집에 가요. 시간이 어중간해서 저녁은 집에 가서야 먹어요. 수학학원이 끝날 쯤엔 배가 고프지만 심화반 선생님이 늘 빵을 챙겨주셔서 괜찮아요.

학원에서 쪽지 시험을 봤는데 세 문제나 틀렸어요. 여기 애들은 다 공부를 잘해서 시험 문제도 어려워요. 그래도 심화반 들면서 백점도 몇 번 맞았는데, 오늘은 아는 문제를 두 개나 실수했어요. 이러면 숙제가 또 많아지는데 걱정이에요.

학원 차에서 내리면 엄마가 단지 앞까지 나와 있어요. 집에 돌아와 손을 씻고, 늦은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앉아 예습을 하고 있으면 영어 선생님이 오세요. 캐나다에서 온 대학생이에요. 엄마랑 있을 땐 한국말도 엄청 잘 하시던데 저랑 있을 땐 안 그래요. 방금 막 한국에 온 사람처럼 영어만 써요. 그게 규칙이래요.

선생님이 가시면 옷을 갈아입고 숙제를 해요. 수학 숙제가 생각보다 많지만 그래도 1시 전에 끝내서 다행이에요. 내일 가는 논술이랑 피아노 학원 책을 넣고 가방을 마저 챙기면 엄마에게 검사를 맡아요. 자리에 누우면 엄마가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앉아요. 몰라서 틀리는 것보다 실수해서 틀리는 게 더 안 좋은 거라고, 이미 여러 번 들은 얘길 또 들을 줄 알았는데 엄마는 내일모레는 실수하지 말라고만 했어요. 그래도 이사 온 뒤로 학교 시험은 늘 잘 봐서 다행이라며 잘하고 있다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요.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잘 자라며 불을 끄고 엄마는 방을 나가요. 깜깜한 방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이대로 아침이 안 왔으면 좋겠단 생각이 자꾸 들어요. 엄마는 잘하고 있다는데, 오늘도 나는 없어요.


2018.03.17.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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