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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Apr 19. 2018

여자는 블로그를 켜 글을 쓴다.

여자는 6년째 이곳에 일기를 쓰고 있다.

여자는 블로그를 켜 글을 쓴다. 이웃은커녕 여태 한 명의 방문자도 없는 블로그. 여자는 6년째 이곳에 일기를 쓰고 있다.

사람들 앞에선 웃었지만 실은 그리 즐겁지 않았던 대화, 복사기 앞에 서 멍하니 했던 생각, 전철에서 사람들 틈에 끼여 우연히 본 앞사람의 휴대전화 메시지 내용,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과 살며 한 번쯤 꼭 다시 만나길 바라는 이의 이름, 잊고 싶지만 자꾸 떠올라 어디든 털어놓고 싶은 일, 간밤에 꾼 정신 사납거나 부끄러운 꿈 이야기. 말할 수 없거나 말하기 싫거나 말하기엔 너무 소소한 모든 이야기를 적었다. 물이 물병에 차오르며 형태를 갖춰가듯, 블로그에 쌓인 글은 여자의 본질 같은 것이 되었다. 누구든 그곳에 올라온 글을 모두 읽는다면 오래 알고 지낸 누구보다-어쩌면 그녀 자신보다도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순전히 편해서였다. 여자는 6년보다 긴 시간 일기장을 써왔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일기장을 가지고 다니자니 왠지 부담스러웠고, 그렇다고 집에서만 쓰자니 시간이 너무 제한적이었다. 쓰려던 내용을 다 적지 못한 날이 많았고 아예 손도 못 댄 날도 늘어만 갔다. 꼬박 한 달을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보낸 뒤, 여자는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바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지 싶었다. 시작은 컴퓨터 문서 파일이었다. 휴대전화에 썼을 땐 메일로 보내 옮겼다. 손으로 적는 것보다 빠른 건 물론, 어디서든 쓸 수 있어 좋았다. 다만 휴대전화로 쓰는 횟수가 적지 않은 만큼 매번 글을 옮기는 과정이 번거로웠다. 그러다 찾은 게 블로그였다. 휴대전화든 컴퓨터든 인터넷 접속만 되면 언제든 바로 글을 이어 쓸 수 있는 곳. 블로그는 여자에게 최적의 일기장이었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가장 큰 장점은 숨기기 쉽다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은 글은 언제 누가 볼지 몰랐다. 일기장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으니까. 죽은 뒤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죽으면 모든 게 유품이 될 텐데, 가족 중 누군가는 분명 여자의 일기장을 읽을 터였다. 어쩌면 가족만이 아닐 수도 있다. 남은 이들에게 떠난 사람의 흔적은 소소하고 일상적일수록 더 소중하게 느껴질 테니까. 그립고 슬픈 만큼 꼼꼼하게, 어쩌면 몇 번이고 읽을지 몰랐다. 어디선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질문을 봤을 때, 고민 없이 일기장을 모두 불태우는 자신을 떠올렸던 여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기장에 적은 글을 블로그에 옮겼다. 다 옮긴 일기장은 파쇄해 없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여자에겐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일기를 쓰려 새로 만든 계정이라 다른 때는 로그인도 하지 않았다. 다른 계정은 모두 휴대전화에 자동 로그인이 저장되어 있지만 이것만은 예외였다. 당연히 모든 글의 검색은 금지했다. 블로그에 글을 적다 죽지 않는 이상은 누구도 여자의 일기를 볼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글을 비공개로 올리진 않았다. 블로그는 감춰져 있지만 그 안에 글은 민낯을 훤히 드러낸 채였다. 검색은 되지 않지만 누군가 주소를 잘못 적어서, 혹은 여자가 모르는 어떤 방법을 통해 블로그에 들어온다면, 그동안 그녀가 적은 모든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럴 리 없고 혹 그러면 어떡하지 걱정하면서도 여자는 막연한 기다림을 품어왔다. 숨어 있는 자신을 누군가 발견해 읽어주진 않을까. 그렇게 나도 몰랐던 어떤 면을 찾아 줄 사람이 있지 않을까.

6년째 0을 가리키는 방문자 수를 보고 안도와 실망을 동시에 느끼며, 여자는 오늘의 일기를 저장한다.


2018.04.05.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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