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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Apr 23. 2018

좁은 방

내 죽음에 필요한 돈을 모아놓고 죽을 수 있을까.

관을 세 개 정도 합치면 이 정도 될까. 방에 누워 양팔을 뻗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 개까진 아니고 두 개 반? 정확한 크기는 모르지만 세 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좁으면 안 되지 않을까. 아닌가, 돈이 없으면 작은 관에 누워야 할까. 어깨를 접고 무릎도 살짝 들 만큼. 높이가 있으니 너무 접진 못하고 살짝. 그래도 안 되면 고개를 숙이고. 돈이 없어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듯 그렇게 관에 들어가야 하는 걸까. 돈이 없으면.

죽고 나면 돈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종종 말씀하셨던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하신 뒤론 한 번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으셨다. 돈을 먹는 병이었다. 사람을 인질로 잡고 살려두는 대가로 매일 돈을 요구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열흘, 한 달을 살 수 있는 돈이 하루 단위로 나갔다. 그럼에도 돈으로 떨어지지 않는 나머지는 고통으로 남았다. 누군가에겐 수술이 인질범을 잡는 과정이지만 할머니에겐 협상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번 큰 몫을 드릴 테니 고통을 줄여주세요. 그렇게 일 년, 십 년은 살 수 있는 돈이 한 번에 나갔다.

왜 인내심은 늘 피해자의 몫일까. 먹을 돈이 떨어지자 병은 망설임 없이 사람을 먹었다. 치료를 포기한 지 겨우 이틀 만이었다. 할머니께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하던 아빠는, 더 이상 돈을 구할 수 없다고 미안하다며 우셨다. 반은 진실이었다. 주변 사람의 미래를 먹는 병이었다. 이미 적지 않은 빚이 있었고, 적지 않은 날을 저당 잡힌 채였다. 할머니의 치료를 포기하지 않으면 가족의 삶을 포기해야 했다. 구할 수 있지만 구할 수 없는 돈이었다.

할머니는 어깨 펴고 발 뻗고 편히 누우셨을까. 관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봉안함의 크기는 선명하다. 사람이 이렇게 작아지는 게 죽음이구나. 바람에 흩날릴 만큼 약해져서 어딘가에 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죽음이구나. 봉안함은 너무 작고 무거웠다.

할머니의 봉안함을 모신 봉안당의 캐비닛은 학교 사물함보다 조금 컸다. 한 개보단 크지만 한 개 반은 안 되는. 누군가의 무덤은 지금 내가 누운 이 방보다 클 텐데, 할머니의 마지막 자리는 전공 책 몇 권만 넣어도 가득 찰 만큼 좁았다.

벌써 몇 번의 제사를 드렸지만 할머니의 흔적은 여전히 가족들의 통장에 남고 있다. 매달 빠짐없이.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데 이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을 거라고 고모는 말씀하셨다. 그 말에 서린 원망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빚을 갚았을 때, 한 달에 한 번씩 찍히던 할머니의 흔적이 끊겼을 때, 아빠와 고모는 과연 어떤 기분이실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게 될까. 관 세 개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좁은 방들이 모여 만든 이 캐비닛에서-그마저 빌려서-살고 있는 나는, 내 죽음에 필요한 돈을 모아놓고 죽을 수 있을까.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방이 좁아진다. 나는 어깨를 접고 무릎을 살짝 들고 고개를 숙인 뒤, 고모의 원망이 향했던 누군가를 향해 사과했다. 돈이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2018.04.11.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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