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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Oct 27. 2024

어느 여름날의 기억

“저기 봐봐. 완전 대가족이지. 다섯 시까지 기다리는가 봐. 그때 닫으니까 티켓 안 사고 들어가려고. 근데 만약에 항상 그런 식이라면 저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우리 가족은 항상 다섯 시가 넘어야 비치에 갔다고 기억할까. 좀 재밌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 앉아 남편이 가리키는 쪽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열 명 남짓 해 보이는 가족이 비치 의자와 파라솔, 간식거리들을 챙겨 들곤  비치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입구엔 들어가려는 사람들보단 짐을 챙겨 나오는 사람들 무리로 더 번잡한 중이었다. 폐장한다고 해도 안전 요원들이 떠나고 매표소 문을 닫을 뿐이고 비치 입구를 막는 건 아니기에 지금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들은 공짜로 들어가기 위해 폐장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번 더 그 가족을 돌아보며 아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우리 아이들과 비슷하게 10살 남짓 돼 보이던 아이들은 조금 지루한 표정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평소 셈에 밝고 손익에 매우 민감하다고 여기던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뭐가 재밌어. 그리고 아닐 수도 있지… ” 라며 말을 흐렸지만 솔직히 그럴 법한 일이라고, 더 솔직히 말하면 ‘그냥 돈 내고 좀 들어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다음 해 여름, 시부모님이 방문하셨다. 무료하게 오전을 흘려보내던 중 남편은 느닷없이 바다에 가자고 했다. 워낙 즉흥적으로 여행을 가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남편이었고, 시부모님도 계셨기에 나 역시 군말 없이  동의했다. 우리가 의례히 가던 그 바닷가로 가기로 한 뒤 부산스럽게 짐을 챙겼다. 아이들 갈아입힐 옷부터 타월, 장난감, 물, 비치 체어까지 한가득 챙겨 트렁크에 실은 뒤 출발했다. 늦게 출발 한 만큼 다 도착했을 때쯤엔 폐장까지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남은 애매한 시간이었다. 남편은 전보다 늘어난 식구 수 때문인지 입장료를 다 내고 지금 들어가긴 아까우니 한 시간 정도 놀면서 기다렸다 들어가자고 했다. 남편의 제안을 듣는 순간 머릿속엔 일 년 전 여름 매표소가 닫기를 기다리고 서 있던 그 대가족과 우리 가족의 모습이 겹쳐졌다. 싫었다. 나는 시부모님도 계신데 기다리기 힘들어하실 수도 있으니 그냥 돈 내고 들어가자고 했지만, 정작 시부모님은 괜찮다며 기다리실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아이들마저 해변 앞 보드워크에 즐비한 게임들과 먹거리에 정신이 팔려 바다엔 조금 있다 들어가도 괜찮다고 했다. 괜찮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계속 혼자 고집을 부릴 순 없으니 단념해야 했다. 아이들과 남편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상품이 걸린 게임도 해 보고, 레모네이드와 평소엔 먹을 일 없는 funnel cake까지 사 먹으며 즐거워했다. 시부모님은 그 뒤를 천천히 따라다니셨고, 난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시간을 확인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시간 다 됐어요. 이제 가 보자!”  

나의 재촉에 남편은 다시 매표소를 향했다. 웬일인지 폐장 시간이 지났는데도 출입구를 지키고 있던 백인 아저씨는 떠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그 사람과 필요 이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거 같아 보이던 남편은 뒤따라 오고 있던 우리를 손짓해 부르는 게 아니라, 되돌아서 혼자 나오는 게 아닌가!

“Oh…we can’t go in now. They don’t let anybody go in after they close” (못 들어간데. 이제는 폐장하면 아예 못 들어간데)

“그런 게 어딨어? 지금이라도 돈 내고 들어간다고 해요!”

내 눈치를 살피며 머쓱해하는 남편과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번갈아 보시며 놀라신 어머님은 순간 분위기를 완화시키시려는 듯 “왜? 가지 마! 안 가도 돼. 돈 내지 마!”라고 소리치셨다. 방침이 바뀌어서 닫은 이후엔 아예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남편 뒤로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있는지 얼굴이 시뻘게진 채 그들을 향해 무언가 한참 말하는 중이었다. 돌아서는데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분이 차올랐다. 돈 있는데. 입장료 내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나 돈 버는데. 원래 항상 입장료 잘 내면서 들어가곤 했는데…


아이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조마조마하며 기분을 살폈는데, 오히려 아이들은 별로 신경 쓰는 거 같지 않았다. 가족들 모두 랍스터 롤이나 먹으러 가자며 차로 향했다. 어차피 바다에 그렇게 많이 가고 싶었던 건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이들을 보니 안도감에 나 역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식당에 도착해서 주문한 음식들도 잘 먹고, 거기에 있던 게임도 하며 웃고 떠들다 다시 집으로 향했다. 모두 잘 놀고 돌아간다는 느낌이었다. 정작 바다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신경 쓰는 거 같지 않았다. 마음이 끝까지 개운치 않았던 건 또다시 나뿐이었다.


못 들어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화가 났던 대상은 남편이었다. 그냥 돈 내고 들어가자고 할 때 내 말을 듣지 얼마나 아낀다고 기다렸다 바다에는 발도 못 담그고 돌아서게 만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모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으니 그것 때문에 계속 마음이 안 좋은 채 남편에게 화를 품고 있는다는 건 오히려 남편이 억울할 노릇이었다. 게다가 남편의 제안은 다수가 수긍할 만큼 현실적이기도 했으니까. 매표소의 아저씨가 좀 더 친절하게 응수했다면 괜찮았을까? 아저씨가 백인이 아니었다면? 분한 맘과 뒤엉켜 처음엔 잘 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지던, 낯설지 않던 그 감정은 수치심이었던 거 같다. 상대가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거 같을 때 보이는 짜증 섞인 눈빛, 무례한 말투, 귀찮은 듯한 태도를- 미국에 오고 한동안 많이 겪었던,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매 번 처음 이민 오면서 입국 심사를 위한 줄에 서서 기다리던 그때 심정으로 돌아가게 만들던- 그 아저씨에게서 보았던 걸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우리 말고도 갑자기 바뀐 방침에 우리처럼 시행착오를 겪는 사람들을 수없이 상대했을 테고 그들 모두 우리처럼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더운 날씨에 바깥에 서서 악역을 맡은 채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즐거울 리 없고 불친절한 태도는 우리에게만 불거져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아저씨가 정말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결국 나의 수치심은 내가 스스로 가지고 있던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여름에 보았던 그 가족들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보았던 것도 나였고, 그 가족들을 오늘 우리 가족과 일치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시선으로 우릴 볼지도 모른다는 편견 안에 갇혀 눈물이 나올 만큼 분을 냈던 것도 결국 나뿐이었으니 말이다. 이민 와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고생하며 차별을 받았던 순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처음엔 그 순간들로 인해 움츠러들었고, 나중엔 오히려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아 조금만 건드려도 날을 세우고 따지려 들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깨달은 것은 그런 예민함이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오해하며 필요 없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낳기도 한다는 거였다. 어디에서 살던, 설령 내가 한국에 살았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들로 차별을 안 당하는 삶을 살기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일 텐데. 그걸 겪으며 알았으면서도 나의 아이들만큼은 그런 걸 몰랐으면 하는 욕심에 내내 홀로 앞서가며 분노와 수치심 사이를 넘나 드느라 결국 가족들과 온전히 함께 즐기지 못한 것이다. 아이들을 차별받지 않도록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내가 가진 편견부터 깨뜨리고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는 노력은 해 볼만 하지 않을까. 그 여름에 보았던 아이들에게 사과해 본다. 미안해, 그날이 너희들에게 뒤돌아보며 웃을 수 있는 반짝거리는 추억의 여름날이 되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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