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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Jun 05. 2022

나의 노래가 너와 다를지라도

나는 아이를 낳기 전부터 육아에 대해 무지했음에도 꽤 구체적인 두려움이 있었는데, 바로 내가 성장한 곳과는 다른 문화권에서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거였다. 물론 어느 문화권에서든 세대차이로 인해 어른들은 아이들의 새로운 문화를 공감하기 힘든 면이 있는가 하면, 공간과 세대를 초월하는 아이들만의 순수함이라던가 청소년들의 반항심 같은 공통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내가 걱정했던 부분은 조금 더 자잘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미국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나 많이 듣는 자장가를 나는 모른다거나, 아이가 가져올 학교 과제들을 어떤 식으로 도와야 할지 감이 안 온다거나 ,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놀이들을 나의 아이만 모를 수도 있다거나 등등... 물론 어떤 엄마든 처음부터 엄마였던 사람은 없으니 누구에게든 새로운 것으로 넘쳐나는 것이 육아이고, 아이가 커감에 따라 계속해서 맞닥드려야 하는 변화들은 두려움과 걱정을 주기 마련이겠지만, 아이가 내가 어렸을 땐 써 본 적이 없던 언어들로 듣고, 보고, 쓰고, 읽으며 자랄 것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걸 내가 인도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다른 차원의 두려움을 주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엄마가 될 거 같은데 한층 더 깊이 있는 부족한 엄마가 될 거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면, 안 그래도 배워야 할 게 많을 거 같은데 뭔가 더 많이 배워야 할 거 같은 부담감이랄까.


한국에서 전형적인 얌전한 학생 스타일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 고등학교로 전학을 하면서 내가 느꼈던 문화 충격은 대단했다. 간간히 영화나 책을 통해 어렴풋한 상상은 했었지만  그들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이나,  개인주의 성향이 확연히 드러나는 사소한 행동들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니 좋게 말하면 매우 신선했고, 솔직히 말하면 심한 이질감을 느꼈었다. 난 콩 하나를 먹더라도 나눠먹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고, 덕을 쌓겠다는 마음까진 없었지만, '옆에 다들 있는데 혼자만 먹는 건 예의가 아니지'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싸온 것을 자기 혼자 먹었고, 그것을 보고 정이 없네라고 느끼는 사람 하나 없었다.  너무 당연한 얘기를 손을 번쩍 들고 앞다투어 발표하는 그들을 보고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뭐지'라고 느끼는 사람도 나뿐인지, 선생님은 그것도 좋은 의견이라며 칭찬해 주었다. 그 당시 어렸던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공감할 수 없는 그들에게 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소외되기는 싫은 마음이 대립과 공존을 반복하며 초라해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물론 이것이 ‘미국 사람은 저렇고 한국 사람은 이래’라고 단순히 가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각 개인의 성향 또한 간과해선 안된다는 것을 오랜 기간 이곳에 산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과는 다른 그들의 양육방식과 교육 환경이 특정 성향을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 결과 그것이 스테레오 타입이라 여겨질지 몰라도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서양 문화권 사람들의 이미지를 형성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날 나의 아이를 나는 과연 미국 사람처럼 키울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키우고 싶긴 한 것인가?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한국 문화에 건강한 자긍심을 지닌, 융화가 잘 되는 미국인으로 키우는 것이겠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키울 수 있단 말인가?


첫 아이를 낳고 보니, 고민은 더욱 실체화됐다. 아이가 데이케어에 다녀온 후 흥얼거리는 노래를 흥겹게 같이 불러주고 싶었다. 대충 들리는 가사를 구글에 입력해 맞을 법한 노래들을 틀어주면서 이 노래가 맞냐며 묻기도 하고, 아이가 맞다고 하면 가사를 외워 같이 부르려 노력도 해보았다. 하지만 한국 노래 가사도 잘 못 외우는지라 영어 노래를 따라 부르려니 역부족이었다. 가사도 정말 황당한 경우가 많아서- 한국 노래로 치자면 ‘딱따구리 구리 마요네즈 마요네즈 케키는 맛 좋아 인도인도 인도 사이다 사이다 사이다 오 땡큐’ 이런 느낌이랄까- 내용이 이해가 안 되니 그냥 무작정 외우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다른 엄마들은 그냥 쿡 찌르면 척 나올 정도로 많이 듣고 자란 노래였을 거라 생각하니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친구들은 학교 런치로 무엇을 싸오는지, 스낵으론 무엇을 싸오는지 넌지시 물어보며 ‘미국스러운’ 런치와 스낵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던 순간도 있었다. 생일 파티에 초대되거나 플레이 데잇을 하게 되었을 때도 나의 어렸을 적 경험이 깃든 기억을 떠올려보기보다는 인터넷으로 검색해 어느 정도까지가 적절한 매너를 지키는 것인지 확인해보곤 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이제는 좀 알 거 같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나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꼭 내가 다 안다고 해서 나의 아이가 행복하게 잘 크리라는 법은 없고, 내가 잘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나를 부족한 엄마라고 여기는 거 같진 않다는 거다. 물론 그 이외의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로 나에게 불만이 있겠지만- 그리고 생각보다 아이들은 관대해서 내가 흥미를 보이면 가르쳐 주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고 잘 알려준다. 그리고 그렇게 배우다 보면 사소하게 다르지만 충분히 비슷한 것들을 종종 만나는 재미도 있다.


예를 들어, 무엇을 고를지 모를 때 아이들은 손가락을 왔다 갔다 하며 주문을 걸듯 외친다.

‘Eeny, meeny, miny, moe, Catch a tiger by the toe. If he hollers, let him go, Eeny, meeny, miny, moe.’

마지막 moe 외칠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고르는 거다. , ‘무엇을 고를까요. 알아 맞혀 보세요. 딩동댕이런 건가.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소리 내어 따라  본다. 틀리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쳐준다. 엄마가 ‘배스킨라빈스대신 ‘라빈스킨,’ ‘피자헛 ‘핫피자,’ ‘베네통 아닌 ‘베네퉁이라고  때마다 내가 터뜨렸던 웃음과 닮아 어 마음은 무안함이 아닌 다정함으로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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