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녁 식사 중 비밀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여섯 살 은이는 키득 거리며 자기와 Leo 사이에 비밀이 있다고 했다. Leo는 요즘 은이가 좋아한다고 말한 아이이고 남편은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소 긴장한다. (그 아이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지만…)
아빠: (과잉보호 모드로) 엄마 아빠한텐 모든 비밀을 말해줘야 해.
아들: NOooo, we don’t. Why would it be a secret then? (말도 안돼. 그럼 그게 왜 비밀이야?)
나: 그렇지만 그게 누군가를 안 좋게 하거나 위험하게 하는 비밀이면 엄마 아빠한테 말해줘야지.
은이: Ok, ok, ok… I will tell you. It’s not like mom will come and tell my class. (알았어, 알았어. 말해줄게. 어차피 엄마가 와서 내 반 아이들에게 말할 것도 아니니.)
은이는 준비하라는 듯이 뜸을 들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입술을 옴싹거렸다. 쓸데없이 경직된 남편을 보며 재밌어하던 나도 무슨 얘기가 나올지 순간적으로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양 볼 가득 물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며 은이는 말했다.
“The secret is…Leo is Batman and… his parents believe him. (그러니까 비밀은, Leo가 배트맨이라는 거야. 그리고 Leo 엄마 아빠도 그렇게 믿는다고 했대)
“뭐어??!! 푸하하하”
그제야 그렇게까지 긴장했던 우리가 어이없었지만, 내심 안심했다. 진지하게 비밀을 나눴을 이 두 꼬마 녀석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귀여워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리오 부모님이 정말 그걸 믿는다고 했냐고 아들이 묻자 은이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리고 약간은 더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웃으며 덧붙였다. “and I kinda do, too (나도 조금은 믿어).”
두 꼬마들에 머물러 있던 마음이 Leo의 부모님에게로 옮겨갔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된 이야기인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중요한 건 아이는 자신이 배트맨이길 바랄 만큼 배트맨을 좋아한다는 것이고, 아이가 자기 반 친구에게 말해 줄 만큼 부모는 아이에게 확신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지만, 나는 적어도 그들이 그 순간 완벽히 아이의 편에 서주었다는 것에 동의하며, 그럴 수 있었던 그들이 눈물 나게 부러웠던 건 나의 그렇지 못했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들 단이는 흔히들 떠올리는 *외향성 남자아이는 아니다.(*선입견을 연상시키는 말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으나 딱히 떠오르는 적당한 말이 없다) 어느 날, 지인은 단이가 옆에 있는데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단이 운동은 안 시키세요? 남자아이는 운동을 시켜야 해요. 특히 팀 스포츠를. 단이 같은 아이일수록 사회성을 기르려면 축구 같은 팀 운동을 시켜야 해요.”
‘지금 뭐라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화가 나 굳어가는 입꼬리를 주체하기 힘들었는데, 아이의 눈치를 보니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알아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은채 딴짓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못마땅했던 건 진부하게 틀에 박힌 그의 생각도, 때와 장소를 잘못 선택했던 그의 부주의함도 아닌, 그 순간 애매모호하게 ‘그렇죠’라는 뉘앙스로 반응하며 결국 아이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내 모습이었다. 정색을 하고 아이의 다른 장점들을 구구절절 읊어가며 항변하는 거 까진 아니더라도, ‘운동은 그렇게 즐기지 않지만 이러이러한 것들을 좋아하고, 잘하고, 또 그런 아이들끼리 어울릴 기회도 요즘엔 많더라고요. 체력을 생각해서 운동을 시켜보는 건 좋은 거 같아요’ 정도까진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쩔 땐 그냥 허공을 맴돌 뿐 아이의 마음에 가 닿는 거 같진 않던 ‘엄마는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라는 칭찬보다 이런 순간 아이의 잘하는 것들을 언급해주고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진실된 칭찬이 되지 않았을까.
만약 다음번에 누군가 나의 아이 앞에서 나의 아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비춘다면 난 내 아이의 편에 서서 그를 위해 싸울 것이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느라 나와 아이와의 관계에 흠을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는 것은 굳이 내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앞으로 수없이 듣게 될 터. 나의 침묵으로 어렴풋이 그걸 느끼게 하는 엄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최고로 여기는, 누가 뭐래도 나의 편에 서주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런 엄마가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나중에 누군가가 Leo에게 네가 배트맨 일리가 없지 않냐고, 너의 부모님이 그걸 믿었을 리가 없지 않냐고 소리치는 순간이 올 때, 그 아이는 그 순간 자기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던 부모님을 원망하게 될까?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감춰진 그들의 사랑과 그를 향한 응원을 느끼고 아이는 한 뼘 더 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