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으로 들어가는 미녀,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
한 여자가 성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 안에는 짐승이 있고, 아버지가 갇혀 있다.
그 여자는 말한다.
“아버지를 놓아주고, 나를 대신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야수는 받아들인다.
이렇게 미녀는 갇히고, 아버지는 풀려난다.
아무도 반문하지 않는다.
“왜 그 여자가 대신 들어가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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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멋진 딸이네.”
“효녀다, 효녀.”
“그건 진짜 사랑이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건 사랑이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훈련된 자기희생의 자동반응일 수도 있다.
“대신할게요.”
“제가 감당할게요.”
“내가 조용히 들어가면, 이 일은 끝나니까요.”
이건 아주 익숙한 선택이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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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말했다:
“건강한 남성성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책임은, 타인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야수는 벨의 선택을 존중한 걸까?
아니면 그냥 받아들인 걸까?
그녀는 원한 게 아니다.
그녀는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나서야 하니까.
그래서 이 장면은 슬프다.
위대해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우리는 종종 사랑과 복종을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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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때문에,
엄마 때문에,
팀 때문에,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 때문에.
그래서 한 발짝 더 물러나고,
자기 시간을 포기하고,
자기 공간을 내주고,
자기 감정을 접는다.
이게 사랑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매번 반복된다면,
그건 습관이다. 자기 말살의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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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은 원해서 하는 거다.
소외는… 당해서 하는 거다.
벨은 첫 번째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 속에 두 번째의 냄새가 난다.
‘이건 내가 해야 하니까’라는 체념이 묻어있다.
그래서 묻고 싶다.
“당신은 누구를 대신해서 갇힌 적 있나?"
“그 선택은 정말 당신이 원했던 건가?“
“혹시 지금도 그 감옥 안에 있지는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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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의 선택은 아름답다.
하지만 더 아름다운 건,
그녀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거다.
그녀는 감옥 안에서
자기 말과 기준을 지키고,
야수에게 화내고,
당당히 요구하고,
심지어 도망간다.
그건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 확장의 시작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감옥에 들어가느냐가 아니라,
거기서 자기를 지킬 수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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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그 성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 첫 만남은 언제나 이상하고, 무섭고, 조금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