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을 냉장고에 보관한다

정이 넘치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정리법

by 오로보이

우리 시대는 감정이 너무 많다.
그래서 정부는 법을 만들었다.


모든 시민은 1인당 감정 3종류까지만

실시간으로 유지가능.

그 외 감정은 냉장보관 혹은 냉동보관 권장.


만약 감정이 넘치면 벌금 500 크레디트

또는 사회봉사 8시간.


주로 연애 감정으로 걸린다.

나는 ‘기쁨’, ‘피로’, ‘허무’ 세 가지를 고정 감정으로 선택했다.


다른 것들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꺼내 쓴다.
사랑은 3일 정도면 신선도가 떨어지고,
분노는 48시간 이상 지나면 폭발한다.
눈물은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수증기로 날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감정을 관리하는 법을 배운다.
냉장, 냉동, 해동, 폐기.
살아간다는 건 곧 감정 처리다.


오늘 아침, 나는 실수로 '그리움'을 꺼냈다.
5년 전 친구와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밑에 묻어두었던 걸 괜히 꺼냈다.

안에 곰팡이도 좀 피었고, 냄새도 났다.
그래서 폐기했다.

“지나간 감정은 다시 먹지 마세요.”
라벨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누가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맞는 말이다.


나는 요즘 ‘분노’를 자주 해동한다.
특히 출근길에.

버스가 늦게 올 때, 택배가 문 앞에 안 왔을 때,
사람들이 내 말 안 들어줄 때.
분노는 빠르게 녹는다.

단점은, 해동이 빠른 만큼 유통기한도 짧다.
30분 지나면 그냥 허무해진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서 가급적 ‘체념’을 들고 다닌다.
작고 휴대하기 좋다.
보온병에 넣어두면 하루 종일 따뜻하게 유지된다.


체념은 가끔 ‘이해심’과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르다.
체념은 “그래, 어쩔 수 없지”라고,
이해심은 “그래, 너도 사정이 있었겠지”다.


말은 비슷한데, 감정의 온도는 다르다.
전자는 17도, 후자는 22도.
체념은 살짝 차갑다.


연애를 시작하려면 ‘설렘’을 꺼내야 한다.
하지만 설렘은 금방 상한다.

설렘을 꺼내는 순간, 동시에 ‘불안’도 따라온다.
이 둘은 같은 칸에 보관되어 있다.
냉장고 설계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게 이 시스템의 버그인지,

설계자의 의도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원래 그런 줄 알고 산다.
이게 바로 ‘성인’이 되는 거다.
불량한 설계도 그냥 받아들이는 것.


가끔은 아무 감정도 없는 날이 있다.
‘공허’는 냉장고에도 없다.

그건 그냥 방 안 구석에 놓인 먼지 같다.
치우기도 애매하고, 모아두기도 애매하다.
그래서 대부분 모른 척하고 산다.

공허가 쌓이면 인간은 ‘기계화’된다.
기계처럼 일하고, 기계처럼 말하고, 기계처럼 웃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카페에서 커피를 사고,
같은 말투로 “따뜻한 아메리카노 주세요”라고 말하고,
카드를 내밀며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그들은 공허를 고정 감정으로 설정한 사람들이다.

안정적이다.
하지만 슬프다.

슬픔조차 느끼지 않아서.


하루는 친구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그녀는 ‘후회’를 실수로 해동했다가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그거, 데워 먹으면 위험해. 그냥 버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그걸 들고 있었다.

그 후로 그녀는 말을 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표정도 없고,
그냥 감정 없이 웃기만 한다.
나는 가끔 그 웃음이 무섭다.

정확히 말하면,
그 웃음 속에 아무 감정도 없다는 게 무섭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감정을 기록하고 있다.


냉장고 문에는 라벨이 가득하다.

사랑: 2023.07.14 냉동, 만료일 미정

분노: 2024.03.03 해동 → 재냉동 → 해동

무기력: 유통기한 없음, 보관만 중

이해심: 누군가 준 감정, 출처 불명

용서: 너무 오래되어 맛을 잃음

외로움: 매일 자동 생성됨

내가 가진 감정 중 가장 오래된 건 ‘외로움’이다.
그건 매일 자가복제된다.
버려도 다시 생기고, 지워도 다시 온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키운다.
화분처럼, 고양이처럼, 방 한쪽에 조용히 두고.


누군가가 말했다:

“인간은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다. 감정이 인간을 소비한다.”


맞는 말이다.
감정은 에너지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조금씩 소모되고 있다.


내 냉장고는 오늘도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가끔씩 ‘진심’을 꺼내 먹는다.
냉동도 아니고, 냉장도 아니고,
그냥 실온에 놔두었던 그것.


그건 좀 덜 안전하지만,
그래도 제일 맛있다.

월, 수, 금 연재
이전 01화기준값이 예뻐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