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기부함은 식후 30분에 비웁니다

감정은 젖은 상태로 기부하지 마세요

by 오로보이

우주 정거장 ₲-22호에는

‘감정 기부함’이라는 함이 있었다.

사이보그들이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
한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들이 감정을 너무 대충 써서입니다.”


그래서 만든 제도가 바로 의무 감정 기부제였다.
모든 시민은 일주일에 한 번,

진짜 감정을 기부해야 했다.
조건은 단 하나.

“자발적으로 느낀 것만 가능함.
억지 감정은 함이 반사함.”


나는 정거장에서 감정 검수관으로 일했다.
기부함에 든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
냄새를 맡아 판별하는 직업이다.

(물론 정말로 냄새를 맡는 건 아니고, 기계로 분석한다하지만 ‘냄새 본능’은 인간의 마지막 감별력이라 남겨두었다.)


감정 기부함에는 온갖 것이 들어온다.

누군가는 첫 출근날 공포를 담았다.

누군가는 오래된 햇빛 냄새 같은 설렘을 담았다.

어떤 노인은 조용히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손주가 날 안아주었어요.
10초 동안.
더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짜 감정이었다.

SNS용 감동,

매뉴얼로 제조된 분노,

자기계발서에서 수입한 감사.


가짜 감정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차가워서
기부함이 “딩동” 소리를 낸다.


진짜 감정은 꾸깃꾸깃하고, 주름지고, 냄새가 난다.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어느 날,
이상한 감정이 들어왔다.


작은 병에 담긴 액체.
내용물은 붉은빛이었고,
스티커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고양이를 보내며,
나는 아홉 번 죽었다.”

그건 너무 진짜였다.
너무 농밀했고,
심지어 시스템이 기부 반려를 표시했다.

“이 감정은 너무 희생적입니다.
시스템 과부하 우려로 보관 불가합니다.”


나는 처음으로 기부함의 규정을 어기고,
그 감정을 몰래 내 방에 보관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울었다.


며칠 뒤,
나는 기부자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냈다.

“그 감정, 정말 감사합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다시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짧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걸 드린 건,
나보다 누군가가 더 필요할 거라 생각해서였어요.”

나는 기부함 옆에 이렇게 적었다

“감정은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환할 수 없는 ‘증여’입니다.”

그 이후,
가짜 감정은 점점 줄어들었다.

누군가는 이별 후 열쇠 하나를 넣었다.

누군가는 냄새가 밴 후드티를 접어 넣었다.

누군가는 딸이 그려준 괴물 그림을 접어 넣었다.
(그 밑엔 “무섭지만 좋아요”라고 적혀 있었다.)


기부함은 여전히 ‘기계’지만,
그 속에 담긴 건
도무지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어느 날,
기부함을 열고 내 감정을 넣었다.

“나는 더 이상 감정을 분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이 감정이 누군가에게 닿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고,
그래서 스스로 희생할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감정이었다.


후기:
나중에 이 이야기를 읽은 외계인 학자가
이 지구인의 문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인간은 감정을 나누려는 순간 가장 인간다워졌고,
감정을 숨기려는 순간 가장 기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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