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행성의 귀환

자발적으로 무게를 고른 존재들에 대하여

by 오로보이

지구에서 27광년 떨어진 곳에, 궤도를 벗어난 작은 행성이 있었다.
공식 명칭은 KX-712-B였지만, 주민들은 그걸 책임 행성이라 불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은 “자발적으로 무게를 선택한 존재들”만 입국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1. 책임은 무게로 배달된다


모든 입국자는 공항에서 자신이 짊어질 무게를 고르게 된다.
선택지는 다양하다.

"연약한 이의 보호자"는 18kg

"침묵 속에서 진실을 말하는 자"는 23kg

"어리석은 리더 대신 결정하는 자"는 31kg

"사랑을 말하지 않고 실천하는 자"는 42kg

그리고 "자기 삶의 운전대를 끝까지 붙잡는 자"는 무게를 재지 않는다. 무게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니까.


2. 소년 '리'의 무게


지구 출신의 열다섯 살 소년 리는 첫 방문자로 기록되었다.
그는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그 대신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제가 원하는 건 진짜 독립이에요.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제가 제 선택을 책임지는 거요.”


공항 직원은 종이를 보고 물었다.
“그게 뭔지 알아?”
리: “몰라요. 근데 뭔가 들고 싶어요. 제 거요.”


그날 밤, 리의 어깨엔 17.2kg의 납덩이가 올라갔다.
그건 ‘자기 선택의 결과’를 뜻하는 무게였다.


신기하게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걷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심지어 누군가 넘어졌을 때 잠깐 내려놓고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3. 어느 행성에서 온 경고장


책임 행성은 어느 날 무선으로 지구에 경고장을 보냈다.


내용은 짧았다.
“귀하의 주민들이 자발적이지 않은 책임을 과도하게 할당받고 있습니다.
이는 자발성을 훼손하고, 무게를 쓰레기로 만듭니다.”


지구는 답하지 않았다. 왜냐면 아무도 무선 수신기를 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책임은 누가 지게 만들 수 있는가"를 고민 중이었다.
"누가 떠맡을 것인가"는 흥정의 문제였고,
"누가 자발적으로 짊어질 것인가"는 미친 사람의 몫이었다.


4. 무게를 드는 자들의 마지막 축제


책임 행성에선 매년 “자발적 무게의 날”이 열린다.
이날은 모두가 자신의 짐을 장식한다.
어떤 이들은 별똥별 모양의 반짝이를 붙이고,
어떤 이들은 짐 위에 작은 식물을 심는다.


"이건 내가 사랑했던 실수야.”
“이건 내가 끝까지 해낸 우정이야.”
“이건 아직 아무도 몰라주는 성실함이야.”


그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 날만큼은 모두가 가볍게 웃었다.


5. 마지막 기록


리의 마지막 기록은 이랬다.
“나는 아직도 무게를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누가 시켜서 든 건 다시 내려놓고 싶고,
내가 원해서 든 건… 왠지 들고 있고 싶어요.
그 무게가 나같거든요.”


그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누군가를 대신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깨엔 여전히 무게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그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월, 수, 금 연재
이전 12화펭귄 학교의 마지막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