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 자동판매기 고장 사건

여유는 버튼이 아니라 기다림의 틈에서 나온다

by 오로보이

행성 X-89에서는 모든 감정이 기계로 나왔다.

사랑은 500크레딧, 분노는 무료 시음용, 그리고 쾌락은… 뭐, 줄이 제일 길었다.


그 행성에는 ‘인내심 자동판매기’도 있었다. 사용법은 간단했다.

오늘 하루를 기꺼이 맡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여유를 받는다.


물론 대부분은 1번에서 탈락했다. “기꺼이 맡긴다”는 문장이 너무 철학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은 쾌락 버튼을 눌렀다. 그건 밝게 빛나고 있었고, 설명서도 단순했다.

내일의 고통을 할부로 설정한다.

지금, 눌러라.

5초 안에 쾌락이 도착한다.


이해하기 쉽고 빠르다. 물론 다음 날, 그들은 어김없이 피곤했다.

그러다 피곤한 자신에게 상을 주며 다시 쾌락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인내심 자동판매기는 점점 녹슬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튼이 고장났다.
딱 한 칸 남은 여유가 버튼 안에 걸려서, 빠지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그걸 본 꼬마 하나가 다가왔다.
“그냥… 기다려보면 되지 않을까요?”

기다림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사용법이었다.


아이의 손은 작은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은 기계 안쪽 먼지를 털어냈다.
딸깍. 버튼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5초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 주변의 시간이 느려졌다.
길던 줄이 멈췄고, 화면 속 광고가 천천히 흘렀다.
누군가 커피를 쏟았는데, 그것도 공중에서 살짝 멈췄다.


아이만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게… 여유인가 봐요.”


그 순간, 인내심 자동판매기의 모니터에 처음 보는 메시지가 떴다.

[신규 메뉴 발견: 자발적 기다림 → 여유 생성됨]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버튼을 누르지 않고도,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누르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게 있다는 걸.


그날 이후로 행성 X-89에서는 버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손을 가만히 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쾌락은 내일의 나에게 빚을 지는 방식이지만,
여유는 오늘의 내가 나를 믿는 방식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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