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_관악구청장배 복싱 대회.
첫 승을 거두었다는 기쁨도 잠시, 또다시 무한대기에 들어갔다.
토너먼트 시합인 만큼 첫 승을 거둔 사람들의 말은 한 단계씩 위로 이동을 했고, 그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야 했으므로 한 경기를 치르고도 2-3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부끄럽지만, 한번 이겼으니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초라도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 방 이불속으로 다이빙하고 싶었다. 또 마음 한편에서는 저 금색 덩어리 뭐라고, 우승 트로피가 탐나기도 했다. 이기고도 싶고 집에도 가고 싶고. 두 가지 마음이 소란스럽게 공존했다.
그 와중에 우리 체육관 사람들의 시합도 열심히 응원했다. 축-!! 첫 트로피가 나왔다.! 기다리느라 조금 지쳐있기는 했지만, 트로피를 손에 넣은 달뜬 회원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힘이 났다. 농담 반으로 내가 치를 마지막 시합에 올라가기 전에 우승 트로피의 기운을 불어넣어달라고 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한 대기의 시간은 바닥을 보였고, 드디어 나의 마지막 결전의 시간이 왔다.
결승이라고 나름 떨렸다. 이길 수 있을까? 지는 걸까? 반반이기는 했지만 거만하게 속으로 '이기겠지'라고 단정했던 것 같다. 링 위에서 마주한 상대의 체격을 보고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침착하게 공격다운 공격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앞 뒤 재지 않고 무작정 달려드는 것 말고 상대를 봐가면서, 숨을 아끼면서 가능한 많은 유효타를 만들고 싶었다.
역시는 역시였다.... 그런 건 그저 나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거였지. 그럼 그렇지.
나는 또다시 달려들었다. 첫 경기보다는 상대를 보려고 조금 노력했지만, 결론은 같았고 상대는 달랐다. 확실히 결승이라서 그런 걸까. 분명히 나보다 왜소하게 보였었는데 공격하는 힘이 매서웠다. 그녀도 나와 같이 돌진을 해왔고, 머리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특히 훅이 정말 셌다.
'이거 잘못 맞으면 안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위빙이 나왔다. 나중에 가족과 회원들이 찍어준 영상을 보니 내 공격도 꽤 매서웠다. 상대를 코너로 몰고 갔고, 꽤나 지치게 만들었다.
(나중에 라이브로 시합을 본 다른 회원들에게 들었는데, 당연히 나의 승리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나는 분명히 괜찮은데, 갑자기 심판은 내게 다운을 줬다. 심판은 상대와 나를 떼어 놓고 숫자를 세기 시작하며 경기를 재개할 수 있냐고 묻는 신호를 보냈다.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으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외쳤다.
'왜 멈추는 거야. 충분히 지금도 할 수 있는데!!'
그래, 이유가 있겠지. 안전이 최우선인 경기인만큼 나를 다운시키고 경기를 잠시 중단시킨 이유가 있겠지... 라며 생각해 봐도 너무 화가 났다. 심판은 다시 경기를 진행시켰고, 이내 시합은 끝이 났다.
찝찝한 마음으로 헤드 기어를 벗고, 심판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긴장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청, 승-!'
상대의 손이 올라갔다. 그렇다. 결과는 나의 '패' 였다. 참, 속상했다. 이런 감정, 낯설었다.
화나고 속상하고 아쉽고 답답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오만가지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다 큰 성인이 이게 뭐라고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는데, 용케도 잘 참아냈다. 날 보러 와준 가족들에게 미안하면서도 내 편들이 이런 순간에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다행히 속상한 감정은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난 뒤 진정되었다.
돌이켜보니 장장 12시간 꼬박을 체육관에 있었던 나 자신이 생소해 웃음이 났다. 정말 오랜만에 승부욕으로 불타올랐던 하루였다. 이제, 후회와 속상함은 접어두기로 했다. 정말 그만큼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생긴 후회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진. 심이었다. 무서웠지만, 그렇다고 무서움에 굴복하지 않고 해보고 싶었던 걸 해본 것만으로도 잘했다.
혼자였으면 엄두도 못 냈을 시합이었고, 버틸 수 없었던 긴긴 하루였다. 이 글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함께 해준 이들에게 감사하다. 그들 역시 박수로 모자를 만큼 멋있는 이들이다.
시합이 끝난 그날 밤.
생체 단톡방에 관장님이 톡을 보내왔다.
"도전을 한 사람만 평가할 수 있어요. 링에 올라가지 않았던 사람의 말은 흘려요.
링을 올라간다는 거 자체가 승리자입니다."
덧붙이기 :)
2024년 4월 봄. 첫 체육관 문을 열던 첫 장면을 시작으로.
2026년 3월 봄. 1승 1패로 링 위를 내려오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난생처음 해본 킥복싱을 통해 내적 성장과 외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속상하거나 우울한 일이 생기면 그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다음날 가벼운 마음으로 글러브를 챙겨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시합을 신청하고.
숱한 두려움을 마주하면서도 극복하고, 극복하지 못할 때도 그럭저럭 잘 넘겨냈다.
오르락내리락하던 몸무게는 안정적인 8kg 감량을 만들어냈다.
처음 체육관에서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회원들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제법 뻘쭘해하지 않고 샌드백을 칠 수 있는 회원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장비를 착용하고 스파링을 할 수 있는 회원이 되었다.
인생을 마주하는 태도가 대단히 용감해진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개복치이고, 다가오지도 않은 무형의 불안감에 손톱을 물어뜯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구원할 방법을 찾아가고 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킥복싱임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으로 그동안의 나는 체육관 생활은 성공인 셈이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킥복싱에 비유하자면, 나는 나를 보호할 수 있는 헤드기어와 신가드와 마우스피스를 모두 쥐고 있음에 든든하달까.
한동안 시합에서 만났던 상대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남아 그날 장면이 자주 재생되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내일 아침에도 글러브를 챙겨 체육관으로 힘차게 걸어갈 것이다.
"오늘은 잽- 내일은 훅 훅-! 그리고 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