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_관악구청장배 복싱 대회.
휴대폰 숫자는 이미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지, 하루도 아니었다.
당장 몇 시간 뒤면 내가 있을 곳은 링 위였다. 계체가 6시 30분부터 시작될 예정이어서 적어도 새벽 5시 40분에는 출발을 해야 했다. 체육관 사람들과 약속 장소에서 그 시간에 보기로 했다. 서둘러 잠을 자야만 했다. 운동만큼이나 잠도 중요하기 때문에 잘 자야 시합날 컨디션이 좋을 것만 같았다.
잠자리에 눕기는 11시 30분 즈음이었지만, 한 시간째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히 떨려서 잠이 오지 않는다기 보다는, 뭐랄까, 강박을 가지고 잠을 자려니 잠이 오지 않았다.
같이 시합에 나가는 친한 언니도 잠이 오지 않는지 열심히 경기 관련 릴스를 보내왔다.
"우리, 이제 자야 해ㅋㅋㅋㅋ 잘 자야 낼 잘 싸우지"
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알람이 울렸다. 4시 30분.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가방은 어젯밤 진작에 챙겨두었다. 5시 30분.
집 앞으로 언니, 오빠들이 날 데리러 도착했다는 톡이 왔다.
그 새벽에 다들 어디를 가는지 고속도로는 자동차 불빛들로 일렁였다.
한 차에 복닥복닥 모여서 음악을 들으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으니 그저 여행 가는 기분이었다.
잠시 들떴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시합장에 도착했다.
조금 아슬아슬했는데, 안전하게 계체 통과!
이제 어젯밤부터 굶주렸던 배를 채워줄 시간이었다. 잘 먹어야 힘이 날 테니!!!
시합장 근처, 24시인 순댓국 집에 들어갔다. 긴장해서 많이 못 먹는 거 아닐까?라는 나의 고민을 스스로 비웃고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어젯밤부터 굶었더니 계체도 통과하고, 순댓국도 맛있게 잘 먹고, 잠을 많이 못 잔 것 치고는 컨디션이 좋았다. 그리고는 무한 대기에 들어갔다.
듣기로 이번에 나간 복싱 생체가 꽤 규모가 있는 시합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링이 두 개나 들어가고도 공간이 넓은 관악구민종합체육센터는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였다. 선착순 300명 신청. 참가자만 최소 250여 명이 되는 덕에 내 차례가 되기까지 끝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멍을 때리기도 하고, 젤리를 씹기도 하고, 체육관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 보니 슬슬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결승에 오르기 위한 첫 번째 경기.
이번 경기를 이겨야 못해도 2등 상장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기고 싶었다.
복도 한쪽에서 몸을 풀었다. 체육관에서 연습했던 동작들을 열심히 복기하며 좌우로 골반과 팔을 움직였다. 몸에 열만 조금 오를 정도로 많은 힘을 빼지는 않았다.
순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관장님과 함께 시합용 빨간색 글러브를 받아 들었다. 체육관 이름이 쓰인 홍색의 복싱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체육관에서만 보던 사각 링. 그것보다 조금 더 크고 높았다. 계단을 올라 고개를 숙이고 링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시야에는 그저 사각 링뿐이었다. 링 아래에 있는 다른 이들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웅성웅성-- 응원해 주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심판이 상대와 나를 가운데로 부르는 손짓을 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받고 다시 코너로 돌아갔다. 그리고 시작-!
상대와 가볍게 주먹 인사를 나눈 뒤, 공격을 시작했다. 여유 있는 공격, 발 빠른 움직임. 그런 건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다. 상대의 공격법을 알 수 없으니, 혹여나 나에게 냅다 돌진해 올까 그게 무서워 내가 먼저 돌진을 했다. 계산없이 그냥 상대의 주먹이 오면 피하려고 노력했고, 피하지 못한 공격은 무식하게 들이받았다. 체력적으로 1분 30초라는 시간은 자신 있었으므로 무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마구잡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체감상 끝났어도 진작에 끝났을 1분 30초가 이렇게 길었었나 싶을 만큼 종이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등을 보이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아래-위, 위-아래의 공격을 섞어 가며 시합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위-위-위 공격만 한 게 아쉽다.
숨을 헐떡이며 지쳐갈 무렵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포기하지 않고 같이 세차게 공격을 이어 나가준 상대도 고마웠다. 내가 아픈 만큼 상대도 아팠겠지.
심판은 홍의 팻말을 들어주었다. 첫 승이었다. 제법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체육관 사람들은 자신의 승리처럼 기뻐해주며 등을 토닥여주었고,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라며 서로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제 됐으니 집에 가고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