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녜스 바르다의 <행복>
나의 첫 번째 프랑스 영화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숙한 소녀의 10대 시절 기억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1970년대 대한민국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중, 후대의 수많은 영화광을 잉태한 탯줄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주말의 명화> 시간이었다. 소녀는 서울시 마포구 주택가 한복판 어느 집 안방에서 별다른 검열 없이 선남선녀들이 등장하는 적지 않은 서양 영화를, 작은 텔레비전을 통해 섭렵했다. 소녀는 늘 고독했으며 영화를 보며 꿈꾸었다. 소녀는 훗날 그녀의 고독한 영화 보기를 공통의 기억으로 간직하게 될 수많은 타인의 존재를 알 리가 없었으며, 그녀의 고독은 또래 친구들과 이 짜릿한 경험을 나눌 수 없었으므로 인해 더욱 배가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행복>은 늘 보던 다른 영화들과는 어딘가 새롭게 다가왔다. 다른 영화들이란 아마도 주로 할리우드의 고전 영화였을 것이다. 소녀가 영화 보기 만큼이나 고독 속에서 행하던 책 읽기의 단골목록 중에는 사진이 가득 실린 김찬삼의 세계여행기가 있었는데, 이 여행기의 서유럽 편을 장식하던 풍경들이 영화의 배경이었다.
화병에 물을 주는 손이나, 단출하지만 아늑한 식탁 등을 무심해 보이면서도 의도적으로 잡아낸, 컷과 컷의 연결로 보여주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단란한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던 한 남자가 우체국의 예쁜 여직원과 사랑에 빠진다.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혹은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우체국에 들르는 순간이, 조용한 일상 안에서 점차 꿈의 공간을 늘려나간다. 꿈의 공간은 조금씩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면서 균열을 만든다. 세상의 모든 사건이 일어나게 마련인 이 ‘어느 날’, 남자를 사랑했던 아내는 남자의 고백을 통해 그의 외도를 알게 되고 (남자에겐 그 사실이 ‘외도’라는 어휘로 한정될 수 없는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는,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주말이면 소풍을 가곤 하던 마을 근처 숲 속의 연못에 빠진다. 바르다 자신조차 이 장면을 이야기하며 '자살이었을까?' 하는 의문문으로 설명한다. 자살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만, 상처 입은 한 영혼의 소멸이었다. 보통의 영화들은 여기서 끝이 나지만, 이 영화는, 전반부의 소풍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단란한 일가의 뒷모습, 엄마의 자리에 아빠의 새 여자를 고스란히 대체해 보여준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여전히 재잘대며 행복한 모습이다. 이 영화는 제목인 <행복>이란 단어와 함께, 소녀의 아늑한 현실을 전복시키는 충격을 남긴다. 영화는 끝이 났고, 그 후로 몇 차례의 현실전복을 경험한 소녀는, 행복이란 말을 들으면 생각에 갈피를 잡지 못하곤 했다.
소녀는 성장하여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영화가 프랑스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루는 누벨바그의 주요 감독 중 한 사람인 아녜스 바르다의 작품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자신의 첫 번째 프랑스 영화였다는 사실과 함께. <행복>은 바르다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는, 소녀에게, 뉴욕의 마천루와 그 안의 넓고 깨끗한 아파트, 먹을 것이 가득한 집채만 한 냉장고, 인형 같은 모습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궤도를 오가며 나쁜 짓이라고는 하지 않는 어른과 아이들이 등장하는 미국의 시트콤이 가져다준 서양에 대한 환상, 어찌 보면 청교도적 이원론의 세계를 깨뜨린 중요한 작품이었다. 지금도 나는 행복을 정의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한 해 전에 태어났으며, 요즘도 나에게 현실은, 종종, 얇고 투명한 유리 조각처럼, 시시각각 찬란하게 부서지는 찰나로 이루어진, 기적의 세트로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직장의 복도에서, 키가 작고 반짝이는 눈빛에, 샘솟듯 흐르는 말을 그치지 못하는 할머니 한 사람을 만났다. 그분을 내게 소개해 준 동료의 입에서 아녜스 바르다라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며칠 후 그분을 만나 여럿이서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도 저렇게 늙을 수 있었으면 했다. 그녀는 경계가 없이 자유롭고 다정하고 겸손하며 소박했고 무엇보다도 건강하고 번득이는 지성과 열정이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행복했다.
“‘행복’이 저의 첫 번째 프랑스 영화였답니다. 그때 저는 열서너 살 쯤이었죠.”
“그건 애들이 보는 영화가 아닌데?” 할머니의 대답이었다.
아녜스 바르다와의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영화만큼이나 독특한 한 권의 회고록을 출판한 적이 있다. 제목은 ‘아녜스가 본 바르다’. 그중 ‘행복’에 할애된 부분을 펼친다.
‘... 영화가 개봉될 당시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수 차례 질문을 받았었다. 답변 중 몇 가지를 간추리면, 행복이란 로크포르 치즈의 맛인 동시에 뮈스카 포도 맛이다. - 행복이란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 - 행복이란 영화를 만드는 것... <행복>에서는 한 여인이 피크닉 도중에 죽는다. 그녀는 꽃을 꺾으러 갔고 호수에 빠진다. 자살이었을까. 찬란한 여름날. 남자는 울고 두 아이도 운다. 이건 영화일 뿐이다. 인생에서 한 소중한 존재의 죽음은, 생존본능이 여전히 로크포르와 뮈스카를 맛보고 싶어 하는 동안 행복이란 단어를 과거 속으로 전복시킨다.’
모차르트는 시종일관 날아갈 듯한 가벼움으로 가슴을 찢어댔다. 로크포르 치즈와 뮈스카 포도를 두 손에 집어든 바르다가 ‘행복’에서 그의 음악을 선택한 이유다. 행복에 대한 오늘치의 정의를 내려보자면, 행복이란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 혹은 그것을 말하는 대신 은밀하게 간직하는 것. 이 정의는 오늘 하루 혹은 이삼일 간 유효하다.
후일담이 있다. 그로부터 십 년 가까이 지나, 나는 파리 산책길에 14구의 다게르길(rue Daguerre)을 걷다가 우연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사다) 바르다 감독의 영화사인 시네 타마리스가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겉모습은 90년대의 비디오 대여점 비슷하게, 진열장 안에 비디오 몇 점과 포스터가 걸려 있어서 발길을 멈추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곳이 시네 타미리스사였다. ‘비디오를 구입하려면 안으로 들어오세요’라는 손으로 쓴 팻말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는 노부인이 계셨다.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노부인이 고개를 들었는데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었다.
이 우연찮은 만남이 신기해서, 인사를 하고 몇 년 전에 서울에 다녀가셨을 때 만난 적이 있다고 하니 반가워하면서 맞아주셨다. 그리고 자기가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왔냐고 해서 전혀 몰랐다고, 시네 타마리스가 여기 있는지도 몰랐는데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렀다고 하니, 가끔 나처럼 우연이 들르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자신의 영화에 출연을 해서 지금 이 우연한 만남을 재현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답하며, 명함을 남기고, 기념으로 사진도 함께 찍고 헤어졌는데, 그 후에 그 작품은 제작이 무산되었는지 소식이 없었다. 새로 개봉하는 영화들을 빠짐없이 보았지만, 그 비슷한 내용이 들어간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로써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바르다 감독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많이 섭섭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때 비디오테이프를 좀 많이 사드릴 걸 하고 후회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