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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Aug 18. 2023

나의 '불란서 영화'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파리의 정사』와 『남과 여』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불란서’라는 단어는 '프랑스(FRANCE)'라는 국가명이 중국에 소개될 때,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가  ‘불랑찰(拂郞察)’로 표기한 것을 필두로, 시간이 흐르며 수많은 명칭의 변이를 거쳐 정착된 단어다. 서울의 프랑스 문화원 현판이 한동안 ‘불란서 문화원’이었던 적이 있었고, 그 명칭에 어느 정도의 향수를 느끼고 있는 중년층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불란서 영화처럼’이라는 시도 썼고, 소설가 K 씨 역시 프랑스와 불란서가 갖는 울림의 두께와 색깔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2000년대에 40대 초반이었던 그는 별다른 근거 없이 ‘프랑스’가 ‘불란서’ 보다 왠지 얄팍하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건 '불란서'가 할머니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불란서'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불란서 문화원’ 현판을 ‘프랑스 문화원’으로 바꿔야 한다고 집요하게 지적해서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에는, 산이나 우물 같은 깊은 공간을 향해 내지르는 소리가 돌려주는 메아리처럼 웅웅대는 떨림 같은 것이 있다. '불란서'는 그런 할머니의 말이다.     


나는 또 시간 여행을 떠난다. 나에게 ‘프랑스 영화’가 아닌 ‘불란서 영화’였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 역시 어린 시절 TV를 통해 보았던 몇 편의 영화였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앞서 언급한 『행복』, 이브 몽탕에게 홀딱 빠져 버리는 계기가 되었던 『파리의 정사(Vivre pour vivre)』 그리고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다. 세 편 모두 수차례 재방영된 바 있는 낡은 축음기 위의 레코드 같은 존재다. 마지막 두 편은 모두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작품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불란서 영화’는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영화인 셈이다. 당시 방송국 영화 프로그램 담당자의 취향을 감수성 예민한 소녀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프랑스 영화사에 있어 를루슈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평가되고 있다. 뿌연 필터 너머로 안개에 싸인 풍경, 주인공들의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가까이에서 잡아내는 감독의 시선, 무엇보다도 ‘다바다바답’이 반복되는 후렴구로 유명한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 그 안을 유영하는 사랑 이야기. 남녀의 갈등과 행복, 그것이 남기는 속 깊은 상처들이 아련하다.     


1966년 파리에서만 70만 관객을 동원한 『남과 여』는, 칸 영화제 사상 황금종려상을 받은 최연소 감독의 작품으로 기록되었고, 오스카에서도 상을 두 개(외국영화상, 각본상)나 거머쥔 스물아홉 애송이의 그 화려한 등극만큼이나 지성적인 비평가와 관객들의 입방아에도 오르내렸던 말 많았던 작품이다.      


영화촬영 중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안(아누크 애메)과, 경주 도중 중상을 입은 자신 때문에 극도의 절망감으로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동차 레이서 장 루이(장 루이 트랭티냥)가, 주말이면 찾아가는 아이들의 기숙학교에서 우연히 인사를 나눈다. 서로에 대한 탐색의 시작, ‘다음에는 부군도 함께 뵙고 싶군요’라는 대사로 상대방이 일찍 남편을 여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는, 극 중의 장 루이보다 이미 영화의 줄거리에 마음을 빼앗긴 관객이 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사랑의 고백을 담은 안의 전보를 받아 들고는 답장을 하는 대신, 레이서답게 모나코에서 파리까지 천삼백여 킬로미터를 밤새도록 달려오며 안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넬까를 궁리하는 장 루이의 모습은, 멜로드라마의 압권을 이루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남녀의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시킨다. 영화의 두 축을 이루는 매력적인 아누크 애메와 장 루이 트랭티냥의 화려한 배역,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조, 시종일관 질주하는 자동차의 스피드, 노르망디 겨울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은 대중들이 영화 속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는 젊은 감독의 교활하기조차 한 술책이었다. 대중은 그것에 기꺼이 넘어가 주었고 영화사는 이를 ‘를루슈 신드롬’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그 이듬해에 제작된 『Vivre pour vivre』는 ‘파리의 정사’라는 우리말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또 한 편의 멜로물이다. 십 년간의 결혼 생활에 지친 로베르(이브 몽탕)는 방송기자로, 아내인 카트린(아니 지라르도)을 저버리고 미국인 패션모델 캔디스(캔디스 버겐)와 밀애를 나눈다. 암스테르담의 뿌연 운하들, 안개에 싸인 파리의 거리들. 나는 유럽의 거리들은 그렇게 일 년 내내 안개에 싸여 있는 줄로만 알았다. 를루슈의 화려한 카메라 워킹을 빼고는 여전히 평단의 푸대접을 받기는 했으나, 이는 국내에 알려진 ‘불란서 영화’의 전형에 자리매김된다. 여기서도 배우들의 매력과, 달콤한 프랑시스 레이의 음악은 톡톡히 한몫한다.      


지적인 조강지처 아니 지라르도는 세월이 만드는 어쩔 수 없는 권태의 희생양이 되는 운명이나,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못하는 여성이고, 캔디스 버겐은 독약처럼 아름다운, 영원할 수는 없는 사랑의 여신이다. 사랑의 여신은 보통 입술 위에 점이 있다. 대중의 정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보편성을 지닌다. 사랑을 위해 사랑을 배신하는 이브 몽탕은 너무 매력적이어서 그만 모든 걸 용서해 주고 싶은 남자가 아닌가. 더구나 그는 사선을 넘나드는 종군기자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두 편의 영화에서 모두 남자 주인공들의 직업은 목숨을 담보로 한다는 점에서 극적 효과를 증폭시킨다. 어설픈 대중문화 옹호론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두 편의 지극히 대중적인 영화에서 상업적인 천박함보다는 문턱 낮은 시민공원의 모습을 끌어내고 싶다. 우린 공원을 산책하며 휴식하고 꿈꾼다. 공원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세트임을 모두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그곳을 거닌다. 아무 생각 없이.     

이 ‘불란서 영화’들은 내게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을 남겨 주었다. 그중 몇 가지는 10여 년 후 그곳에 머무는 동안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고, 몇 가지는 아직 버리지 않고 일부러 간직하고 싶은 것들도 있다. 영화 속에서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낭만적으로만 보이던 겨울 안개 덕택에 1년 중 거의 반이 겨울인 파리에서 감기와 싸워야 했고, 대규모 전시장 안에서까지 ‘골루아즈’와 ‘지탄’의 고약한 담배 연기로 나를 질식시켰던 남녀노소의 애연가들은 공공장소에서의 금연을 다른 나라보다 지연시켰다. 모나코에서 열리는 ‘포르뮐 1’ 자동차 경주 대회와, 사하라 사막을 달리는 죽음의 질주 ‘파리-다카르’는 프랑스를 모험가의 나라로 각인시킨다. 유학생들 사이에서, 미국에서는 마약을, 프랑스에서는 사랑을 조심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적으로 개방된 풍토는, 엄격한 유교적 관습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파리의 로맨스를 꿈꾸었던 동아시아 학생들에게 많은 회한을 남기기도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불란서 영화’는, 한 소녀가 프랑스라는 나라를 신비화하는데 일조했고, 신비감에 대한 동경으로 그 나라를 직접 경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므로, 그 신비화 자체가 나아가서는 탈신비화로의 연결점도 제시해 준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장성한 소녀는 여전히 ‘불란서 영화’가 남긴 환상을 앨범에 담긴 사진처럼 간직하고 싶어 한다. 벽장 구석 깊숙이 숨겨 놓은 달콤한 초콜릿 한 상자를 두고두고 하나씩 꺼내 먹는 삶의 작은 기쁨을 위하여... ‘행복은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던 바르다 감독 말에 동의한다.     


내 마음속에 정형화되어 있는 두 편의 ‘불란서 영화’에 대한 스킨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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