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기는 것이 좋다. 대체적으로 지지부진한 범인들의 고단한 삶, 때로는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인간사, 여기에 가끔씩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처럼 키득키득으로 시작해서 낄낄거리고 깔깔거리는 웃음은 공해로 찌든 대기에 한 모금 산소 같은 존재다. 조카 녀석은 코흘리개 적부터 ‘너무너무 심심해서 코피나 났으면 좋겠다’며 노래를 불렀고 나의 어린 시절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그 말이 가끔씩 귓전을 맴돌았다. 그 유년의 권태를 잊기 위해 나는 다락방에 가득히 쌓여 있던 수많은 만화책의 애독자가 되었고, 저녁 여섯 시면 텔레비전 앞에 턱을 괴고 앉아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만화영화에 몰두했으며, 주말이면 방영되던 ‘웃으면 복이 와요’의 애청자였고, 사춘기 시절에는 크고 작은 하루의 에피소드에 만화까지 곁들여 담은 쪽지를 단짝 친구와 주고받으며 지루한 학창 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다. 심심해서 온몸이 배배 꼬여 더 이상 꼬일 수 없을 때 이 ‘웃기는 것들’은 코피처럼 찬란히 나의 심신을 터뜨려 주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한동안 나의 삶은 너무나 심각하게 흘러갔다. 나는 어른이 되기 위해 심각한 책들을 읽었고 심각한 생각들을 했으며 종종 심각한 사건들이 터지곤 했다. 솜털복숭이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던 것이다. 이마에 내천(川) 자를 지우기 힘든 고단한 나이로 접어들수록 이에 비례해 더욱 이‘웃기는 것’에 대한 집착이 커졌던 것을 보면, ‘사는 것이 끔찍하고 우울할 때 희극을 썼고 환희에 찬 나날에 비극을 썼다,’는 우디 앨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프랑스의 코미디물을 접한 것은 역시 브라운관을 통해서였고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피에르 리샤르(Pierre Richard) 주연의 <삐에르의 외출(La moutarde me monte au nez)> (1974) (원제목을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겨자가 코끝으로 올라오다’라는 뜻으로, 프랑스인들은 ‘화나다’, ‘열받다’라는 표현을 구어체로 이렇게 쓴다.)와 대학 시절 프랑스문화원 르누아르 상영관에서 본 루이 드 퓌네스(Louis de Funès)의 코미디물을 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코미디는 나에게 그 두 사람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에 앞서 빠뜨릴 수 없는 거장이 있으니, 미국의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에 필적하는 자크 타티(Jacaues Tati)가 있다. 채플린이 스승으로 생각했던 20세기 초반 최고 희극 배우이자 감독 막스 린더(Max Linder)도 프랑스 사람이었다.
우체부 프랑수아와 윌로 씨
자크 타티의 첫 장편영화 <축제날 Jour de fête>은 1948년 작으로, 그에 앞서 단편 <우체부 학교 L'école des facteurs (1947)>을 통해 그 밑그림이 완성된 바 있다. 프랑스 내륙 한 복판에 위치한 생 세베르 쉬르 앵드르 (Saint-Sévère-sur-Indre)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20세기 중반 프랑스 시골 축제의 모습을 담아, 소박하고도 느린 삶을 살고 있던 우체부 프랑수아가 미국문화의 물결에 동요되는 모습을 섬세하고도 코믹한 한 편의 시로 풀어내고 있다.
생 세베르 쉬르 앵드르 (출처: 위키피디아/ Morburre )
타티 자신이 배역을 맡은 우체부 프랑수아는 시골 마을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허름한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싣고 하루 종일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편물을 배달한다. 선술집에서는 마을 사내들이 장난 삼아 먹이는 술 몇 잔에 취해 직업적인 의무감을 잠깐 내려놓기도 하고, 약간 모자란 듯한 그를 코흘리개 꼬마들까지 놀려먹지만 축제 마당의 천막극장에서 개구멍으로 훔쳐본 미국식의 신속한 우편배달 업무 장면에 고무된 그는 ‘미국식’으로 자신의 배달 방식을 개선하기로 마음먹는다. 다 쓰러져 가는 우체국에서 하품이 날 지경으로 느릿느릿 일을 하는 동료들을 비웃으며 우편물을 챙긴 프랑스와는 맹렬한 속도로 자전거를 몰고 내달려 지나가던 트럭 꽁무니에 붙는다. 이때부터 이 영화의 명장면이 시작되는데...
달리는 트럭에 매달려 열심히 우편물에 도장을 찍는 모습, 전속력으로 경주하고 있는 사이클링 선수들을 추월하는 프랑수아, 잠시 자동차 옆에 걸쳐놓은 자전거가 차가 출발하자 거기에 매달려 달리다가 갈림길에서 떨어져 나와 커브 길에서도 투명인간이 타고 있는 듯이 일상의 궤도를 따라 달려가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타티적 상상력의 탁월한 열매가 아닐 수 없다.
우체부 프랑수아에 이어, 역시 타티의 분신과도 같은 윌로 씨는 <윌로 씨의 휴가 Les vacances de Monsieur Hulot (1952)>를 시작으로, <우리 삼촌 Mon oncle (1958)>, <플레이타임 Playtime (1967)>, <트래픽 Trafic (1971)>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네 작품에서 모두 윌로는 세상의 질서와 정상적인 어른들의 세계를 비껴가는 주변인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유로운 영혼이다.
"윌로는 한 번도 세상 물정에 밝아본 적이 없다. 채플린은 장애물, 자신을 방해하는 사물 앞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사물을 해석하고 문제를 해결하지만 윌로는 무언가를 의도하고 만들어내지 않는다. <윌로 씨의 휴가> 중 묘지 장면에, 차가 고장 나 트렁크를 열어 타이어 튜브를 집어드는 순간 땅에 떨어뜨리고 거기에 나뭇잎이 달라붙는다. 장례행렬이 도착하자 그것이 화환인 줄 알고 고마워한다. 윌로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채플린이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그는 일부러 나뭇잎을 붙이고 예의 지팡이를 돌리며 화환을 내밀었을 것이다. 관객은 거기서 의도된 코믹을 만나게 될 것이다. 윌로는 왜 튜브에 나뭇잎이 붙었는지도 모르는 체 묘지를 나선다. 그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중략) 나는 빵을 구워내듯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나는 빵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산책한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한 개인이 그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과 무의식적인 버릇을 관찰한다. 메시지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점점 기계화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개성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