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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Jan 14. 2024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고향에 가다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옥스퍼드를 떠나며, 나는 그간 마르셀 에메나 보르헤스의 단편들 말고는 영국식 장편 환상 문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일반 소설에 환상적 요소가 가미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전설과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수많은 비현실적 캐릭터와 복잡한 세계관으로 방대하게 퍼져나가는 이야기의 물량 공세가 내겐 버거웠던 탓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 영국 방문을 계기로, 조금씩 관심을 가져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들른 식당에서는 코티지 파이를 먹었다. 영국의 음식에는 그다지 큰 기대가 없긴 했지만, 그레비 소스를 넣은 다진 소고기에 매쉬드 포테이토를 올려서 오븐에 구운 소박한 가정식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농지를 소유한 부농의 ‘팜 하우스’와 대비되어, ‘코티지’란 자기 땅이 없어 남의 땅을 경작해서 살아가는 소작농의 농가를 의미한다고 한다. 먹고 남은 고기 조각을 재활용하는 요리가 코티지 파이라고 했다. 여기다 양고기를 넣으면 셰퍼드 파이, 즉 양치기들이 먹는 고기 파이가 된다.        


셰익스피어의 아내 앤 해서웨이가 결혼 전에 살던 집. 앤 해서웨이 코티지. (출처:위키피디아. by Tony Hisgett)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이 긴 지명을 아는 이는 그보다는 적을 것 같다. 옥스퍼드를 출발해서,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는 버밍햄 방향으로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작은 도시(우리 눈에는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에 가까운)이다. 인구가 약 2만 7천이라면, 인구밀도가 낮을 수는 있겠지만, 서울의 웬만한 동 정도의 규모다.      


문학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작가의 생가 혹은 관련 장소를 방문하는 것은 다소 성지 순례의 느낌이 있다. 특히 10년 전에 출간했던 프랑스 문학 기행을 쓴 이후엔, 어느 나라로 여행을 가도, 또는 국내에서 지방으로 여행을 가도, 거의 습관처럼 그 지역 문인들의 발자취를 적어도 한 군데는 꼭 들르곤 했다. 나만의 루틴이었다. 시간 여유가 없어서 그 루틴을 놓치면 마음 한구석 서운함을 지울 수 없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그들의 작품도 꼭 한 편은 챙겨보려 한다. 그렇게 하면 그 지역과 더욱 가까워진 기분이 되곤 한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가 느끼기는 힘든 정서를 맛볼 수도 있다. 그런데 무려 셰익스피어라니... 너무 유명해서 아무 느낌이 없는 그 이름.     


어린 시절, 계몽사에서 출간되었던 주황색 표지의 50권짜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은 내 정신의 보물창고였는데, 그중 제6권이 《셰익스피어 이야기》였다. 이 문학 전집 중 몇 권은 지금까지도 보관하고 있기에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린이용으로 읽기 쉽게 요약된 내용이었겠지만, 「한여름밤의 꿈」이나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등은 정말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중학생이 되어 제일 지겨워했던 독후감 쓰기 때문에 「리어왕」을 숙제처럼 억지로 읽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여러 연출과 각기 다른 배우들이 공연한 햄릿과 오델로를 몇 차례 보았다. 셰익스피어 덕후인 배우 알 파치노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뉴욕광시곡(Looking for Richard)」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그의 생가가 있는 장소에 오니 그간 내가 접했던 셰익스피어에 관한 모든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방문객이 많아 생가 입장을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입구에 비치해 놓은 ‘한국어판’ 셰익스피어 공식 안내서를 구입했다. 한글을 보니 또 무척 반가웠다.       


헨리 스트리트의 셰익스피어 동상(좌) 셰익스피어 생가(중앙) 생가 입구의 표지판(우)



400년 전의 건물과 정원을 지키는 데는 많은 사람의 관심과 정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 사후 자손들에게 상속되어 오다가 19세기 초반에 매물로 나오게 되었을 때,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전국적으로 캠페인을 벌인 끝에 모금을 해서 집이 다른 곳에 팔리지 않도록 매입, 국가에 기증했다고 한다. 정원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언급되던 식물을 위주로 조성했다고 한다. 식물애호가로 알려지기도 한 그는 작품 속에서 800여 차례에 걸쳐 꽃과 나무, 버섯 등을 언급했다고도 한다. 아기자기하고 정다운 정원을 지나, 그가 태어난 방,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던 식당, 훗날 여관으로 사용하던 증축된 건물 등을 둘러보았다. 가죽 장갑을 제조하여 부를 이룬 그의 부친의 공방도 볼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 일가족이 사용한 식당(좌) 셰익스피어 부친의 가죽제품 공방(우)  All rights reserved 2024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방(좌) 생가의 정원(우) All rights reserved 2024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채플 스트리트에 셰익스피어가 가족과 함께 지낸 마지막 거처, ‘뉴 플레이스’가 있다. 2016년 8월에 7백만 유로(약 100억 원)가 넘는 비용을 들여 새 단장을 마쳤다. 원래 셰익스피어 일가가 거주하던 건물은 18세기에 프랜시스 개스트렐이라는 주교의 손에 철거되었다. 이때 셰익스피어가 직접 식수한 것으로 알려진 뽕나무까지 베어 버려 주민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이 건물을 지었을 때는 런던에서 성공한 37세의 셰익스피어가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이었다. 그곳에서 보낸 19년은 그에게 축제 같은 나날이었다고 혹자는 말한다.      


뉴플레이스의 허브 정원 (by Megan Taylor & Shakespeare Birthplace Trust)


역사학자들은 그곳의 정원을 그가 직접 조성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여행 중에 보았던 엘리자베스 시대풍의 정원들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 한다. 입구에는 잔디 마당이 있고, 집 뒤쪽으로 개인 정원, 즉, 위에서 내려다보면 회양목으로 수를 놓듯이 장식한 프랑스 정원과 흡사하게, 기하학적 모양의 영국식 허브 가든(Knot Garden이라 부르는)이나 과수원이 꼭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라벤더, 타임, 오레가노, 산톨리나, 히솝 같은 향이 강한 허브들을 심어 식용으로도 썼다.     


셰익스피어의 부인이었던 앤 해서웨이(우리가 아는 미국 배우와 동명이다)가 결혼 전에 살았던 농가의 정원이 가장 잘 가꾸어졌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스트랫퍼드에서 1마일 정도 떨어져 있다는 그곳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유학 시절로 돌아간다면 문학 대신 원예와 조경을 공부해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와 영국의 정원 가꾸기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여전히 원예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상태이지만.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로망은 여전히 로망으로 남아 있다.      


빗속의 산책과 밀려오는 상념에도 커피가 고팠다. 점심 식사 후 시간이 촉박해서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는 ‘테이크 아웃’ 대신 ‘테이크 어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인솔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셰익스피어의 생가에서 나와, 같은 거리, 헨리 스트리트에 있는 영국에서 가장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 코스타 커피를 기웃거렸으나 대기 줄이 너무 길어 건너편에 ‘커피 #1’이라는 카페에서 생명수를 보충했다.

 

"테이크 어웨이, 플리즈!"


버스 출발 시간에 늦을까 봐 심장이 쫄깃했지만 결국 성공했다.  배운 단어는 곧장 써먹는 적응력에 스스로 감탄한다. 내일쯤엔 영국식 액센트 구사도 가능할지 모른다. 뭔가에 칭찬을 듣는 일이 좀체로 없다 보면 자화자찬을 취미삼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


다음 일정은 리버풀. 비틀스를 찾아갈 차례다. 마을을 떠나는데 눈에 들어온 에이번강이 퍽 정답게 보였다. 셰익스피어 선생님, 잠시 뿐이지만, 그래도 잘 다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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