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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Jan 03. 2024

옥스퍼드에 비가 내리면

일행을 태운 버스의 운전기사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영국식 악센트를 담뿍 담아 건네는, 명랑 쾌활한 인사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체격이 당당하고, 씩씩했다. 그러나 우리를 호텔에 내려준 뒤 한밤중에 호텔 정원에서 롤링 타바코를 말아 피우던 그녀의 뒷모습은, 늘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형 버스를 능숙하게 운전하고 혼자 힘으로 무거운 여행용 가방을 씩씩하게 옮기던 앞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사람의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가 있다.      

 

일기예보는 내일 옥스퍼드에 비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14시간의 비행 끝에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니 히스로 공항 도착 후 입국 심사로 향하는 통로에서 보았던 태극기가 생각났다. 영국과 EU 국가 이외에, 아시아에선 일본과 싱가포르, 한국이 자동 출입국 심사를 이용하게 된 것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지나가는 청소부 아저씨가 엄청 무게를 잡으며 못 찍게 했다. 2019년부터는 한국인들도 여권 스캔, 안면인식으로만 이루어지는 자동 입국 심사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1980년대의 유럽인들을 겪어 본 사람이라서, 이 지점에서는 무언가 뿌듯한 느낌이 있었다. 첫날밤은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길 건너 맥도널드의 노란 불빛을 흘끔 쳐다보고는 이내 잠이 들었다.     

이게 뭐라고 좀 뿌듯하긴 했다.

모험이라고는 없는, 무사안일 내 돈 내산 버스 여행의 쫄깃한 맛은, 2박 이상을 하는 도시가 아닌 이상, ‘거의 매일 아침 잃어버린 물건 없이 짐을 챙겨야 한다는 것’과 ‘일행과 버스를 놓치지 않고,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인솔자의 안내에 다른 사람들이 정신을 파는 동안 ‘일정한 반경 안에서 최대한 딴짓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인솔자가 내게 물었다.      


“샘은 어디로 그렇게 잽싸게 사라지시는 거예요?”

“그러게요, 호호호! 사진 찍기 바빠서…. 그래도 길 잃어버린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하하하!”     


이렇게 구글 지도만 믿고 상습적으로 삼천포로 빠지다가 한 번은 길에 홀려서(길을 잃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헤매는 바람에 약속한 시각, 장소에 슬라이딩하며 세이프로 들어온 적이 있긴 했다. 바스에서 제인 오스틴 때문에…. 그 이야기는 바스 편에서 풀어보기로 하자.     


옥스퍼드의 우중 산책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서울은 연일 30도를 웃도는 염천이었는데 으슬으슬하기까지 한 영국의 날씨에 감사(?)했다. 우산을 챙기고 방수 윈드재킷을 입었다. 보통 유럽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현지의 관습대로 우산을 잘 쓰지 않는데 나는 예외다. 비가 산성비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 유럽에서도, 우산도 쓰고 심지어 양산도 썼다. 양산은 햇빛 알레르기 때문이다. 요즘은 문화가 조금씩 달라져서 양산을 쓰는 유럽 남자들도 본 적이 있다. 암튼 난 비 구경은 좋아하지만, 비 맞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마침 졸업식이 있는 날이어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로 가는 길에 래드클리프 카메라 앞에서 졸업생들과 그들의 가족 친지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각모와 가운을 입은 졸업생들이 연신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광경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입학식이라는 것도, 졸업식이라는 것도 없는 프랑스의 대학과는 대조적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여파일까, 68 학생 혁명의 여파일까, 개인주의자들의 나라라서 그럴까? 21세기에 들어서는 조금씩 세계화된 사립학교들에서 앵글로색슨식의 졸업식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백 퍼센트 국립인 대학교에서는 학사뿐 아니라 박사도 졸업식은 없다. 박사 학위 심사를 하는 날, 심사위원들과 지인들과 함께 조촐한 뒤풀이를 할 뿐이다. 모자나 가운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래드클리프 카메라에서 열린 옥스포드 대학교 졸업식 인파

혹시 요즘은 조금 달라졌나 검색을 해보니 2018년에 파리 5 대학 수학/컴퓨터 공학 학사 졸업식을 영미식으로 한 분이 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그 대학에서 그런 방식의 졸업식을 한 것은 처음이었고, 그것도 학년 전체가 아닌 해당 학과만 그렇게 해서 타 학과 학생들이 항의했다고 한다. 자기들 방식만 고집하던 콧대 높던 프랑스도 세계화의 물결에 조금씩 그 아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는 했다.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는 옥스퍼드 38개 칼리지 중에서도 영국의 총리를 9명이나 배출한 유서 깊은 칼리지로 유명하다. 인솔자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식으로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라고 자랑하면 꼭 칼리지를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이라고 해서 모두 명문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리포터의 촬영지로 더 유명한 곳이다. 물론 그 안에서 촬영을 한 것은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학생들이 이용 중인 내부 식당 더 그레이트 홀(The Great Hall)을 본뜬 세트를 지었다고 한다. 옥스퍼드와 해리포터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이 이미 했으니, 여기선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J. K. 롤링의 대선배들(?) 이야기를 잠시 꺼내 보자.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전경

환상 문학의 대표 작가들인, <나니아 연대기>의 루이스, <반지의 제왕>의 톨킨, <올빼미 접시>의 앨런 가너, <어둠은 떠오른다>의 수잔 쿠퍼, <황금나침반>의 필립 풀먼 등이 모두 옥스퍼드 출신임을 생각하면, 옥스퍼드는 가히 환상 문학의 온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가들에 대한 전시가 열렸던 보들리안 도서관 또한 나의 직업적인 관심 때문에라도 건성으로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인클링의 모임 장소였던 펍 <독수리와 아이>        출처: http://ardapedia.herr-der-ringe-film.de/index.php/Benutzer:Cirda

옥스퍼드에는 ‘독수리와 아이(The Eagle and Child)’라는 유서 깊은 펍이 있다. 1930년대 초반에 이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하던 ‘인클링(Inkling)’이라는 문학 동아리가 있었는데 환상 문학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그 구성원 중에는 환상 문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름은 들어봤음 직한 톨킨과 루이스가 있었다.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 사이로, 두 사람이 우정 어린 경쟁 관계에서 서로에게 끼친 영향은 20세기 초반에 환상 문학의 부흥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톨킨이 환상 문학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가 환상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하나의 장르를 만든 공은 그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클링’은 격식을 갖추지 않은 자유로운 모임이었다. 회장이나 규칙 따위는 없었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농담을 하다가 각자 자신이 집필 중인 작품을 낭송하고 동료들로부터 한 마디씩 논평을 듣는 시간을 보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도, 루이스의 거의 모든 작품도 이 동아리에서 발표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J. K. 롤링은 중고생 시절에 《반지의 제왕》을 책이 닳을 지경으로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보들리안 도서관은 영국에서 가장 큰 대학도서관 시스템으로 그 규모는 영국국립도서관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고 한다. 옥스퍼드 대학 내의 107개 도서관을 연결한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1602년에 세워진 구 보들리안 도서관, 내가 그 앞을 지나던 시간에 졸업식이 있었던 래드클리프 카메라(18세기 전반에 과학도서관으로 설립), 신 보들리안으로 불리는 웨스톤 도서관 등이다. 이 세 개 건물이 위치한 브로드 가의 지하에는 터널이 뚫려 있어서 그 통로로 자료를 이동시킨다고 한다. 구텐베르크의 성경 전문, 셰익스피어 최초의 희곡집 등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들이 보들리안에 소장되어 있다.

존 래드클리프(1652-1714)라는 이름은 옥스퍼드의 건물들 곳곳에서 아볼 수 있는데, 13세부터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왕의 주치의이자, 옥스퍼드 내 몇 개 건물들을 짓도록 재정을 지원한 공신이다. 래드클리프 카메라도 자신의 이름을 딴 도서관을 짓고 싶다는 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구 보들리안 도서관

중세에 지어진 옥스퍼드 성에는 지금도 귀신들이 종종 출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옥스퍼드 귀신 이야기는 하도 들어서 대낮에 거리에서 귀신을 만나도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것만 같다.


몇 년 전 열린 한 전시회 포스터에 적힌 필립 풀먼의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옥스퍼드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이 거리에서 서로 치고받는다. - 필립 풀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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