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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Sep 22. 2023

'여배우' (2)

카트린 드뇌브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Je vous aime(1981)>    


 

출처: Télérama


클로드 베리 감독의 1981년 작인 이 영화가 카트린 드뇌브의 그 어떤 대표작, 예를 들어 <마지막 지하철 Le dernier métro(1980)>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Ma saison préférée(1993)>등 보다 더 마음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카트린 드뇌브의 감수성과 재능이라는 붓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인의 아름다운 초상을 성공적으로 그려낸 감독의 솜씨 덕분이다. 주인공 알리스의 배역은 드뇌브에게 잘 어울리는 의상처럼 아름다웠다.     


네 명의 남자와 차례로 만나고 헤어지며 아이들을 낳고 결국엔 혼자가 되는 이 여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이에게선 예술적인 감수성을, 또 어떤 이에게서는 부드러움을, 어떤 이에게서는 남성적인 매력을 발견하고 사랑했으나 그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연약한 남자들이었다. 사랑에 대한 어떤 환상이 여인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일까. 결혼하고 몇 년이면 계약을 갱신하고 싶어도, 좋은 게 좋은 거라서, 또 아이들 때문에, 혹은 사회적인 관습이 요구하는 대로, 혹은 일부종사를 대원칙으로 삼는 종교적인 이유로,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와 사는 것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이 땅의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그럼 도대체 뭔가. 바본가 게으른가 의존적인가 위선적인가, 아니면, 너무나 그를 혹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인가.     


그녀의 ‘그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한 자리에 모이기도 하고 여름휴가 때 그녀의 집에 모이기도 하면서 마치 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남자들 사이엔 묘한 긴장이 감돈다. 아이들과 남자들을 차례로 보내고 혼자 남아 정원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알리스, 그녀의 모습은, 영화감독 로제 바딤, 사진작가 데이비드 베일리, 영화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와 함께 생의 한때를 보내고 그들의 아이를 낳았던 카트린 드뇌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여인들과 나의 공통점은, 죽을 때 몇 컷의 아름다운 추억과 그 추억이 낳은 몇 개의 상처, 그 수술 자국과 흉터가 남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 땅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것. 사랑, 그 덧없는 이름.     

눈을 감으면 극 중 세르주 스부르와 듀엣으로 부른 ‘Dieu, fumeur de havanes 하바나 엽 궐련을 피우는 신'이 귓전을 맴돈다. 이를 계기로 스부르는 후에 드뇌브를 위해 앨범 ’Souviens-toi de m'oublier 날 잊은 거 기억나‘를 작곡한다.               



<인도차이나 Indochine(1991)>    


      

출처: Elle(좌) /Vietnam+(우)


30년대의 인도차이나. 엘리안 드브리(카트린 드뇌브)는 규모가 큰 고무농장을 경영하는 부호로, 부모를 잃은 카미유를 양녀로 맞아들인다. 모녀는 동시에 쟝 바티스트(뱅상 페레즈)라는 해군 장교를 사랑하게 되고 카미유는 혁명을 도모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프랑스 장교를 살해한 카미유를 구하려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함께 쫓기는 신세가 된 쟝 바티스트. 그의 아이를 낳은 카미유는 수용소에 수감되고 쟝 바티스트는 프랑스의 한 제국주의자에게 살해된다. 그들의 아이를 맡아 키운 엘리안은 1954년 장성한 손자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한 주네브 국제회의에 참석차 온 카미유를 만나게 해주려 하지만 손자는 이를 거절하고 다시 엘리안에게 돌아온다.          


카트린 드뇌브의 무르익은 연기를 볼 수 있었던 <인도차이나>는 식민지와 피식민국의 투쟁을 그린 정치적 구도와, 모녀가 한 남자를 사랑하는 극적인 멜로물의 구조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세자르상 여우주연상과 아카데미 외국 영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쟝 바티스트역을 맡은 뱅상 페레즈의 불꽃같은 열정과, 크리스털처럼 차갑고 고독한 그녀의 매력이 천둥처럼 부딪치는 순간, 이제 막 피어난 한 송이 여린 꽃망울 같은 딸이 자신의 연인을 사랑하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미로서의 본능이 한 여자로서의 욕망을 제어하는 기막힌 감정의 변화를 연기해 내는 드뇌브는 이 영화로 배우로서의 절정을 맞이한 듯이 보이기에 충분했었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어떤 방식으로 착취했었는지와 그곳에서 지배계층에 속했던 프랑스인들 또한 식민주의라는 정의롭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동시에 드러냄으로 공정성을 기하려는 이야기의 전개도 인상적이었다. 인도차이나의 신비로운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뒤틀리는 개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까닭에, 이미 그와 같은 상황을 직접, 간접적으로 경험한 국내 관객들에게 더 가까이 와닿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로, 드뇌브는 <인도차이나>에서 미모의 정점을 찍었다.     


언젠가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그녀를 연극이 어울리지 않는 천상 영화배우라고 지적하자,     

"영화가 좀 더 육(肉)적이죠. 연극에서는 작품이 훌륭하고 감동적이어도 나는 여전히 관객으로 남아 있을 뿐이에요. 영화를 볼 땐 한순간,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처럼 스크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걸 느껴요. 연극에서는 조명이나 붉은 커튼 등 때문에 관객임을 자각하지만, 영화에서는 나 자신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지요. 연극이 공연이라면 영화는 삶을 본뜨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이 인터뷰 내용을 읽으며, 앞서 이미 말했듯이 그녀의 연기가 왜 내 안에서 육화(肉化)되는 느낌을 받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녀는 확실히 무대 위에서보다는 카메라 앞에서 빛을 발하는 ‘영화배우’였던 것이다.     

영화와 연극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우위를 따지는 일은 어리석다. 다만 모디아노와 드뇌브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아주 훌륭한 영화배우가 무대 위에서는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무대 위에서 찬란했던 연극배우가 카메라를 거치면 어쩐지 어색한 경우는 종종 있다. 이는 배우의 호흡이 길다거나 아니면 순발력이 좀 더 있다거나 하는 개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에서 성공하는 배우들이 드물게 있기는 하지만.     


갑자기 드뇌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졌던 이유는, 아마도 그이의 한 여자로서의 삶이 뭉클하고, 배우로서 외길 70년이 문득 부러워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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