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잠시 몸담았었던 나의 직장은 여성 직원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각자의 담당 부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외국계 직장이어서인지 자신의 타고난 성에 대한 핸디캡을 느낄 기회는 그다지 없었던, 대한민국에서는 비교적 행복한 축에 속하는 ‘여성 근로자’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외려 외부의 한국 남성들로부터 종종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곤 했는데, 그것은 이 기관을 대표할 만한 ‘나이 든 한국 남성’을 요구하는 그들의 당당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맡은 업무의 내용에는 상관없이 ‘젊은 여직원’은 도무지 상대를 할 수가 없어, 도리어 업무를 그르치고 돌아가는 일도 종종 보았다. 업무에 충실하여 그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줄 수 있는 ‘젊은 여직원’들은 자신들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사람과는 업무상의 대화를 하려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나의 동료들은 한결같이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가까운 나라인 일본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어서, 한 중년의 일본 남성이 앞서 언급한 한국 남성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좀 안타까우면서도 정말 코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어떤 직책 앞에 ‘여’ 자 붙이는 것을 소름 끼치게 싫어하는 여성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사장, 여판사, 여기자, 여선생, 여직원, 여류소설가, 여류 화가, 여류 감독 등, 그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사전적 의미로 '여류'란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일컫는다고 하는데, 요즘은 '여류'라는 단어 대신 '여성'으로 대치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여’ 자를 붙여 성을 구별하는 일을 치욕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명사에 남성형과 여성형의 구별이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프랑스에서는 같은 의미의 명사라도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한 기관의 ‘장’을 뜻하는 ‘directeur’라는 단어는 그 여성형으로 ‘directrice’가 대응된다. ‘남자배우’는 ‘acteur’, '여자배우‘는 ’actrice‘, 남자가수는 'chanteur', 여자가수는 'chanteuse'와 같은 식이다. 그러나 성의 구분이 여성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작가'를 뜻하는 'écrivain'이란 단어에는 원래 여성형이 없었는데, 여성 작가에게는 여성형 어미 ‘e’를 붙여서 ‘écrivaine’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어떤 언어를 쓰는가에 따라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사고방식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제목을 ‘여배우’로 붙여 놓고는 서론이 너무 길어진 듯도 하지만, 내게는 ‘여배우’라는 단어가 ‘배우’라는 단어와는 좀 다른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로 인해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내가 사적으로 생각하는 '여배우'는, 젊어서 반짝 잠시뿐인 필사(必死)의 미모를 가지고 가벼운 놀음을 하는 사람이 아니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기까지 창녀와 무녀와 성녀 사이를 오가는 한평생을 보냈거나, 보낼 운명인 이에게만 주어지는 '여신(女神)'의 또 다른 이름이다. 몇 사람의 여배우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신적인 존재들이다. 인간의 어떤 부분을 뛰어넘는 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길지도 않은 한 생을 선택의 여지없이 딱 한 사람의 몫으로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특별히 답답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삶과 연기는, 내 안에서 살이 되어 다시 탯줄로 이어지고, 곧 탄생과 죽음이, 제 꼬리를 입에 문 뱀처럼 얼핏 일직선으로 보이지만, 순환하는 한 우주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곧장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를 가졌다.
나는 이쯤에서 카트린 드뇌브를 떠올린다. 그이는 ‘프랑스 여배우’의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키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1978년 국민 가수 미레유 마티유에 뒤를 이어, 1985년 드뇌브는 프랑스혁명의 범국가적 상징인 여성상 ‘마리안’으로 추대된 바 있다. 용기와 승리의 상징이자 가장 프랑스적인 미를 간직한 여성에 대한 찬사인 셈이다. 1956년에 데뷔한 드뇌브는 3년 후면 배우 생활 70년을 맞이하는데 그간 단 한 번의 휴지 기간도 없이 꾸준히 촬영에 임했고, 이 정도면 영화는 바로 그의 삶 자체인 셈이다. 80세의 나이에도 내년까지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자면, 안타깝게도 이미 고인이 되신 윤정희 배우나 문희, 엄앵란, 김지미 같은 배우들이 지금도 매년 영화에 출연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배우로서의 소명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셰르부르의 우산(1963)>을 쓴 <로슈포르의 아가씨들(1966)>
200여 편의 연극과 20여 편의 영화출연 경력을 가진 아버지와 역시 연극배우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네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난 카트린 드뇌브(본명: 카트린 도를레악)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의 데뷔작인 <여중생 Les collégiennes (1956)>을 찍을 때 만해도, 수줍고 조용한 성격의 소녀는 그냥 촬영장의 분위기가 재미있고 감독의 작업이 흥미로웠던 것이었을 뿐, 자신이 프랑스 최고의 배우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자크 드미는 내가 영화창작의 당위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엄청난 의심을 말끔히 없애 주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자크 드미(Jacques Demy)라는 거장을 만나 국내 관객에게도 제목이 무척 낯익은 <셰르부르의 우산 Les parapluies de Cherbourg (1963)>에 출연함으로써 60년 대장정의 화려한 막을 올린다. 영화의 내용은 자세히 몰라도, 제목이나 미셸 르그랑의 그 유명한 테마음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이 작품이 이듬해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달콤한 음악과 멜로적인 줄거리뿐 아니라, 무엇보다 청순하고 풋풋한 금발의 여주인공 주느비에브의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꿈을 건드려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1957년 11월 셰르부르. 주느비에브는 어머니와 함께 우산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주느비에브는 자동차 정비공 기를 사랑하지만, 어머니는 그녀가 부유한 보석상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알제리 전쟁이 발발하여 기는 알제리로 징집되고 주느비에브는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는데, 세월이 흘러도 기에게서는 소식이 없고 기다림에 지친 주느비에브는 보석상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1959년 다리에 부상을 입은 기가 돌아오지만, 주느비에브는 이미 셰르부르를 떠나고... 함박눈이 쏟아지는 성탄절 밤, 주느비에브가 우연히 들린 주유소는 바로 다른 여자와 결혼한 기가 주인이었고 이미 엇갈린 그들의 운명은 또 한 번의 이별을 낳는다.
출처: Unifrance
미국식의 뮤지컬을 동경했던 자크 드미는 또 한 편의 뮤지컬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로슈포르의 모습을 담은 오래된 한 장의 우편엽서에서 영감을 받아, 다소 단조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작은 지방도시 로슈포르에,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잠에서 깨운 왕자님처럼 기념비적인 숨결을 불어넣는다. <로슈포르의 아가씨들 Les Demoiselles de Rochefort>에서 카트린 드뇌브는 금발의 무용선생 델핀으로, 친언니이자 극 중의 쌍둥이 자매인 프랑수아즈 도를레악은 음악선생 솔랑주로 출연한다.
로슈포르에 성대한 마을 축제가 열리게 된다. 이 마을 저 마을, 이 도시 저 도시를 유랑하며 공연을 하는 프로 쇼단이 델핀과 솔랑주에게 출연을 제의하고, 그 대가로 파리에 데려가 줄 것을 약속한다. 생애 최고의 사랑을 꿈꾸는 자매는 각각 아마추어 화가인 해병과 저명한 미국인 피아니스트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어머니 이본은 옛사랑과의 뜻하지 않은 재회로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어찌 보면 진부하고, 유치하기조차 한 줄거리인데도, 숨바꼭질하는 듯한 감정의 엇갈림과 설렘, 아름다운 배우들과 함께, 잿빛 항구도시인 로슈포르를 색채와 춤, 노래의 향연으로 끌어올린 드미의 솜씨는, 우리를 아무런 사심 없이 잠시 무지갯빛 꿈에 젖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로슈포르의 아가씨들>의 에필로그 격인 <아가씨들, 25세를 맞다 Les Demoiselles ont eu 25 ans>는 드미의 부인인 아녜스 바르다가 감독한 다큐멘터리로, <로슈포르의 아가씨들>의 메이킹 영상인 동시에 영화제작 25주년을 맞아 로슈포르시에서 열렸던 기념행사의 장면이 첨가되어, 영화 한 편이, 촬영장소가 되었던 한 도시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한 전범이 되고 있다.
<로슈포르의 아가씨들> 촬영지 로슈포르의 콜베르 광장 출처 yoyo,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본 영화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바르다는 1990년 남편을 여읜 후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당시의 필름 조각을 이어 맞추어 이 작품을 완성했으니, 1966년에서 1992년까지 25년 동안 만들어낸 셈이다. 첫 장면은, 로슈포르의 공항에 초로의 카트린 드뇌브와 미셸 르그랑, 아녜스 바르다가 차례로 트랩을 내려오는 광경. 영화의 장면 장면들과 25년이 지난 후 당시를 회상하는 드뇌브의 모습이 차례로 이어지고, 영화에 출연했던 어린이들이 장성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촬영이 인연이 되어 결혼에까지 이른 한 부부도 당시를 회상하며, 이 영화 한 편이 그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 도시에는 배우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그중엔 드뇌브와 함께 출연했고 그 이듬해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던 친언니 프랑스와 도를레악 거리도 있었다. 영화를 찍는 일이 바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의 연장이었던 제작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환대하여 촬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준 시민들의 모습이 또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순간이었다. 이런 과정들이 아마도 드뇌브로 하여금, 그로부터 오랫동안 배우라는 직업을 가르쳐 준 드미-바르다 부부와 혈연 같은 우정을 나누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