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앞에 피어난 야생 장미
호손은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독자에게 감옥 문 앞에 피어난 야생 장미 한 송이를 꺾어서 건넨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호손이 이 장미를 건넨 것은 일종의 마법이었다.
이 장미로 인해 나는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판단보다 연민을 느꼈다. 이 이야기에서 도덕보다 생명력을 읽었다. 그래서, 한번 읽고 나서도 이 책이 다시 생각이 났다.
결국 책을 다시 읽게 되었고, 서평도 쓴다.
야생 장미가 건 마법에 빠져서.
이 흉물스러운 건물 앞쪽부터 마찻길에 이르기까지 우엉, 명아주, 페루 사과, 그리고 그밖에 볼품없는 잡초 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풀밭이 있었다. 그 보기 흉한 식물들은 감옥이라는 문명사회의 까만 꽃을 아주 일찍 피웠던 그 토양에서 일종의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감옥 문 한쪽에는 야생 장미 덤불이 거의 문턱까지 뿌리를 뻗고 있었는데, 때마침 6월을 맞아 우아한 보석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 꽃송이들의 향기와 덧없는 아름다움은 감옥으로 막 들어가는 죄수에게나, 처형당하러 감옥에서 나오는 기결수에게나, 깊은 마음으로 동정을 보내고 친절을 베푸리라는 대자연의 정표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 장미 덤불은 이상한 우연으로 역사 속에 살아남아 있다. 그러나 이 장미가 본래 그것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거대한 소나무들과 떡갈나무들이 쓰러지고 나서 오랜 후에 예전의 황량한 광야에서 단순히 살아남은 것인지, 어떤 믿을 만한 이유로 성녀 앤 허친슨이 감옥 문을 들어갈 때 밟은 발자국 밑에서 돋아난 것인지는 단정 짓지 말기로 하자.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야기의 문턱인 바로 이 불길한 감옥 문 앞에서 발견했으니, 아무래도 그 중 한 송이를 꺾어 독자에게 선사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이 꽃이 우리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만발하게 될지 모를 향기로운 교훈을 상징해 주거나, 인간의 나약함과 비애에 대한 이야기의 결말에서 느껴질 음울함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길 기대해 보자.
내가 느끼기에 호손의 야생 장미는 헤스터와 닮아 있다.
장미는 타고난 자유로움, 원죄, 생명력, 에로스 등을 모두 상징하는 것 같다. 감옥 문 앞에 핀 야생 장미는 뚜렷한 대비를 통해 이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감옥은 법과 규율, 죄의 언어가 시작되는 장소지만, 그 앞에 피어난 야생 장미는 그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생명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이는 인간이 만든 의미 체계와 자연이 가진 무의미한-의미 바깥까지 포함하는- 생명력의 대비이다.
또한 야생 장미는 순결한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장미는 가시(발톱, 고통)가 있는 생명체이다. 즉, 장미라는 생명체 안에서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 생명력, 그리고 고통이 분리될 수 없다. 이들이 하나의 장미를 형성한다. 이는 원죄를 포함한 채로 피어나는 생명을 의미한다.
장미는 바로 원죄의 반대가 아닌, 원죄를 품은 자연이다.
헤스터는 죄에 의해 사회에서 추방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안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다. 그녀의 삶 속에는 감정, 욕망, 모성, 노동, 연민이 모두 죽지 않고 살아있다.
전부터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불행의 먹구름에 가려 의기소침하고 침울해져 있을 거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그녀가 아름다움으로 돋보이고 있는 데다가 그녀를 감싼 불행과 치욕이 일종의 후광처럼 빛나는 것을 보고는, 놀란 정도가 아니라 숫제 아연실색하였다.
가장 처음 장면, 죄를 지은 여인으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자리에서도 헤스터는 자신이 그 자리에서 입을 옷을 감옥 안에서 지어 입고 나온다. 또한 죄인처럼 행동하지 않으며 도도한 모습을 잃지 않는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늘 당신에게 솔직했어요."
헤스터는 너무도 비통한 심정이었기에 지금 자기의 치욕의 징표를 조용히 찌르는 이 최후의 칼끝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느낀 적도 없었고 그런 척하지도 않았어요."
감옥 안으로 찾아와 몇 년 만에 재회한 남편 로저 칠링워스가 하는 말들을 듣고 헤스터가 답하는 말.
그녀는 본성의 평범한 힘으로 그 생활을 견뎌 나가든가 그 밑에 쓰러지는 수밖에 없었다. 미래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했다. 내일은 내일의 시련이 있을 것이고, 다음 날 또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날들은 각각 다른 시련을 갖고 닥쳐올 것이며, 그 시련들은 지금 당하고 있는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참기 힘든 고통과 유사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직 치욕의 상징이 될 뿐인 이 고장을 구태여 고향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정말 놀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숙명, 즉 거역할 수도 뿌리칠 수도 없는 운명적인 힘을 지닌 감정이란 것이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평생을 채색하는 어떤 중대하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 주변을 유령처럼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기 마련이다.
헤스터 프린에게 있어 바느질이란 삶의 열정을 표현하는 방식인 동시에 그 열정을 식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녀는 다른 모든 기쁨을 물리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열정마저도 죄스러운 것으로 여겨 물리쳤다. 그녀의 양심이 하찮은 일에까지, 이렇게 병적이라 할 만큼 일일이 찔리게 된다는 것은 그녀의 회개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 확신이 없는 것, 근본적으로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지 적이 의문스럽다.
이런 식으로 헤스터 프린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역할을 찾게 되었다. 비록 카인의 이마에 찍힌 것보다도 더 참기 힘든 낙인을 가슴에 달게 되었을망정 그녀는 천성이 강하고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에 세상은 그녀를 완전히 저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회와 접촉하는 동안 자신도 그 사회에 속해 있다고 느끼게 해줄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헤스터 프린이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애써 믿으려 한 사실이야말로, 자신의 연약한 천성과 인간 사회의 가혹한 규범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녀가,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증거라고 독자들은 받아들여 주기 바란다.
헤스터 프린의 경우에는 남을 자극하는 일도 성가시게 구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대중과 맞서 싸우지도 않았고, 푸대접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고뇌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세상의 동정심에 기대지도 않았다. ... 다만 누구나 마셔도 되는 공기를 마시며 자기 손으로 부지런히 일하여 어린 펄과 자신을 위한 하루하루의 끼니를 마련했다. 또한 그녀가 남에게 도움을 베풀 때면 언제나 인류의 자매임을 자처하며 최선을 다했다는 것 역시 세상에 알려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마다 넉넉하지 않은 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는 일을 그녀만큼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 온 읍내에 역병이 퍼졌을 때 헤스터만큼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도 없었다. 사실상 사회 전체가 당하는 것이든 개인이 당하는 것이든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무슨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헤스터는 재빨리 자기가 해야 할 일거리를 발견했다. 그녀는 걱정거리로 침울해하고 있는 집에는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식구로서 허물없이 찾아갔다. 마치 그 침울한 어둠이 그녀에게 이웃들과 사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매개체인 것 같았다. 수놓은 글자는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천상의 빛으로 안식을 주는 듯 빛나고 있었다. 다른 데서는 죄악의 표적에 지나지 않는 주홍 글자가 환자의 방에서는 촛불이 되었다. ... 주홍 글자는 그녀의 직업을 상징했다. 그녀가 남을 돕는 힘이 어찌나 놀라웠던지, 즉 어찌나 실천력이 크고 어찌나 동정심이 강했던지 많은 사람들이 주홍 글자 A를 원래의 뜻대로 해석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능력 있음(Able)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헤스터 프린은 한 여성의 것이라기엔 참으로 강인한 힘의 소유자였다.
헤스터는 감정과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노동하여 먹고 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숨기지 않은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간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주홍 글자 A의 의미, Adultery를 스스로 Able로 변화시킨다.
그녀의 딸, 펄은 거의 장미가 인간의 몸을 입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이다. 장미가 걸어 다니는 형상이다.
펄은 이유 없이 웃고, 이유 없이 반항하고, 때로는 심술 궃게, 장난스럽게 군다.
의미를 요구받을수록 더 의미에서 벗어난다.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타고난 생명력을 드러낸다. 마치 장미처럼. 상징을 거부하는 상징이다. 상징의 부산물이 아니라 상징을 견디지 못하는 생명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엄마의 주홍 글자를 의미로 읽으려는 어른들 앞에서, 펄은 그걸 장난감처럼 다룬다. 이는 인간은 의미를 붙이지만, 자연은 그걸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보여준다.
펄은 인간이 명명한 죄의 결과로 태어났지만, 죄를 증명하지 않는다. 태어남, 생명 그 자체를 보여줄 뿐이다.
이런 외모의 변화무쌍함은 펄의 내면에 있는 갖가지 생명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과 같았다. 아기의 천성은 다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깊이까지 있는 것 같았다. 아기의 본성에는 자신이 태어난 세상과의 그 어떤 유대감도 그 어떤 적응력도 없었다. ... 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하나의 중대한 법칙이 깨지고 말았다. 그 결과 아이가 가진 성질들은 아름답고 찬란하면서도 모순으로 점철된 무질서한 것들이었다. 설령 질서가 있다 하더라도 매우 특이한 것이어서 거기서 어떤 변화와 배합의 핵심을 찾기란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했다. 펄이 영적인 세계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채워가고, 흙으로부터 자신의 골격을 형성해 가고 있던 그 중요한 시기에, 오직 헤스터만이 그녀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림으로써 아이의 성격을 지극히 막연하고 불충분한 차원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엄마의 정열적인 정신 상태가 아직 배 속에 있던 아기에게 도덕적 삶의 광채를 전하는 매개체 노릇을 했다. 그리하여 아기의 광채는 본디 새하얗고 맑았으나, 도중에 매개물을 거치는 바람에 짙은 주홍빛과 금빛, 이글거리는 광채, 검은 그림자, 그리고 강렬한 빛과 같은 성질들을 흡수하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즈음 펄은 헤스터의 정신적 갈등을 받아들였고 그것은 아이의 안에 남게 되었다. 헤스터는 펄에게서 자기의 난폭하고 절망적이며 반항적인 감정과 변덕스러운 기질, 심지어 자신의 가슴에 깃든 우수와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이야 아직 어린아이니까 모든 것이 아침 햇살처럼 찬란해 보이지만, 언젠가는 그런 성질이 폭풍과 회오리 바람을 몰고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펄의 타고난 성품은 생명력이 넘치고 무질서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펄의 성질 속에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던 들뜬 요소들이 고이 간직되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헤스터의 경우 이런 성질이 펄을 낳은 뒤에는 모성 때문에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펄은 무례하게도 손가락을 입에 물고 윌슨 목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드디어 자기는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엄마가 감옥 문 옆에 나 있는 야생 장미 덤불에서 따 온 것이라고 대답했다.
누가 너를 만든 것이냐는 목사의 질문 앞에서(목사가 기대한 답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였다), 어린 펄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 아이를 주셨어요! 그분은 저에게서 앗아 가신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이 아이를 주신 거예요. 이 애는 저의 행복이예요! 물론 저의 고통이기도 하지요! 제가 여기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펄이 있기 때문이라고요! 펄은 저에게 벌을 주기도 합니다! 바로 이 애가 저에게는 주홍 글자라는 사실을 모르시겠어요? 제가 사랑하는 건 이 아이 하나뿐이거든요. 따라서 제 아이는 제가 지은 죄를 벌하는 엄청나게 큰 힘을 부여받고 있지요. 그러니 나리들한테 아이를 뺏길 수는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제가 먼저 죽고 말 거예요!"
부모로서 자격이 없다며 펄을 빼앗아 가려는 사람들에게 헤스터가 호소하는 장면. 헤스터의 죄로 인해 태어났지만, 헤스터의 사랑과 펄의 태어남이 과연 분리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펄의 태어남이 죄인가? 그렇지 않다면, 펄을 태어나게 한 헤스터의 사랑 또한 죄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언어는 그걸 죄라고 명명했지만, 자연의 눈에서도 과연 그러한가?
소설 속에서 에로스에 대한 표현은 극히 절제되어 있고 직접적으로 다뤄지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암시되는 부분은 대담하게 느껴진다.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 작가는 에로스를 죄라고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죄 이전에 생명이 있고, 규범 이전에 욕망이 있는 것처럼 다룬다. 작가는 해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냥 장미를 감옥 문 앞에 둠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그 상징을 이해하도록 놔둔다. 의미를 만들려는 인간과, 의미 없이도 계속 피어나는 것 사이의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작가의 태도이다.
주홍 글자와 야생 장미와 펄은 닮았다.
주홍 글자와 장미 둘 다 인간이 의미를 덧씌운 것이지만, 그 의미를 조용히 배반한다.
주홍 글자 A는 죄의 기호로 시작했지만 살아 있는 헤스터의 삶을 통과하며 다른 의미(able)를 띄게 되었다. 야생 장미는 자연의 장식처럼 보이지만 감옥 앞에 피어 있음으로써 윤리를 흔든다.
호손은 원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직하게 인정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어긋나 있고, 욕망하고, 상처를 만들고, 책임지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지속되는가?
장미가 그 대답이다. "원죄가 있어도, 아니 원죄와 함께 피어난다"라고.
장미는 구원의 상징도, 속죄의 증거도, 위안의 장치도 아닌, 그냥 여전히 살아서 피어 있는 것이다.
조건이 없는 생명이고, 착하거나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이해받지 못해도 그냥 피어난다. 이건 인간의 '죄'라는 기준에서 보았을 거의 반항에 가까운 아름다움이다. 바로 '생명력'이다.
결과적으로 주홍 글자, 장미, 펄은 죄의 언어를 통과했지만, 생명의 리듬을 잃지 않은 것들이다. 완결은 없지만 지속은 있는 것, 해결하지 않고도 계속되는 것.
제도와 도덕은 시대에 따라 낡고 바뀌지만, 생명은 낡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 책 속에서, 장미는 누군가가 그걸 알아볼 때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정의도 시대에 따라 바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마치 죄에서 회복되는 인간의 여정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력과 죄를 대비시키며 계속해서 묻고 있다.
그것이 정말 죄인가, 태어난 것이,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것이 죄인가, 라고.
헤스터의 죄는 사실 행위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존재 상태에 가깝다.
사랑했고, 아이를 낳았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졌지만 살아남았다는 것.
법적으로는 간통죄였지만 생명의 질서로서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래서 사실 소설의 중심은 회개가 아니다.
헤스터는 죄를 씻지 않고, 그저 그 숙명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즉, 헤스터에게는 처음부터 '용서'의 순간이 없다. 대신에 긴 시간이 주어진다. 노동, 양육, 관계, 연민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것이 죄인가? 난 이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이 펄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펄은 죄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어떤 상징도 거부한다.
죄는 배워야만 아는 개념이지만, 펄은 이미 자신이 생명이라는 것을 배우지 않고도 알고 있다.
딤즈데일이 무너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태어남을 긍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욕망도 아이의 존재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류'로 남기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숨긴다. 그리고 그것을 죄라고 여기며 괴로워한다.
그래서 최후의 고백은 해방이 아닌 소진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이 나를 오래 붙든 이유는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과연 죄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언제나 유효하므로.
내가 느끼기에 이 작품은 사람을 단죄하지 않고 조용히 독자에게 말한다.
"태어난 게 죄가 아니니, 그대로 살아도 된다"라고.
이 책에는 이 외에도 얘기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딤즈데일 목사와 의사 로저 칠링워스의 모습들에서도 많은 걸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른 서평에서도 많이 이야기된 것들이기에, 또 이 이야기에서 내가 읽어낸 것은 그것이 아니기에 이 글에서는 야생 장미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이 서평을 통해 누군가에게 감옥 앞의 야생 장미를 한 송이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