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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Sep 10. 2023

아흔여섯 그녀의 기록 본능

큰손녀 용돈 10000원, 콩나물 500원, 우유 1500원.


신 여사는 매일 가계부를 썼다. 요즘도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은행, 농협, 신협 같은 금융기관에서 주는 가계부가 있었다. 엑셀처럼 날짜별로 수입과 지출을 적는 항목이 있고, 간단히 메모할 수 있는 네모난 칸도 자리했다. 신 여사는 그곳을 하루도 빠짐없이 채웠다. 기껏해야 짧은 세 문장이 들어갔을까. 그건 할머니의 일기이자 기록이었다.


"할머니는 만날 언니 얘기만 써. 내가 소고기 끊어다가 갖다 드려도 그건 없고 그날 언니가 전화 한 통 했다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고 쓰셨어." 동생은 서운한 듯, 할머니를 뵙고 오는 날이면 여러 번 볼멘소리를 했다. 할머니는 고관절 수술로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 몇 년 동안 집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 작은 몸으로 잰걸음을 걷던 그녀가 발바닥을 땅에 딛고 움직이지 않아서일까. 거미줄 같이 세밀했던 기억도 흐릿하게 지워버렸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머리맡에 놓인 가계부. 낮은 자개장 위에서 침대로 자리만 옮겼을 뿐, 할머니 손이 닿는 범위 안에는 늘 가계부가 있다. 쓰던 페이지에 항상 모나미 153 볼펜이 끼워 있어 살짝 틈이 벌어진 가계부. 금세 내용이 보일 듯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것을 누가 들여다보는 걸 싫어해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동생은 할머니가 화장실 간 틈을 타 몰래 훔쳐본 모양이다. 역시 일기는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시선을 탄다.


'00가 전화했다. 하루종일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00가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다. 얼마나 울었나 모른다.' 할머니 일기 속에는 큰손녀가 자주 등장했다. 누군가 이리 물은 적이 있다. "박 기자는 글 쓰는 재주를 누굴 닮았어요? 부모님 중에 누가 글을 잘 쓰시나?" 한 번도 생각해 본 일 없는 질문에 눈을 두어 번 굴리고는 "아빠?"라고 답했다. 엄마인가? 엄마는 자주 도시락통 안에, 책상 위에, 가방 안에 짧고도 긴 편지를 넣어놓곤 했다. 그래도 애서가인 아빠가 왠지 글을 더 잘 쓴다는 인상이 내게 있었다. 얼마 전 불현듯 내 핏속에 글 쓰는 유전자를 넣은 건 신 여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한 눈으로 종일 TV만 쳐다보는 나날이 계속돼도, 집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지를 못하도 할머니 가계부는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1년 365일.


할머니는 손 때 묻은 성경책에도 깨알 같은 메모를 했다. 옛날 성경이 에센스 사전에나 쓰는 얇은 종이로 만들어 가볍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내게 자랑했다. 조선시대 책 마냥 세로로 글자가 내려가는 성경 속지는 잠자리 날개같이 얇고 투명했다. 앞장에 뭐라도 쓰면 뒷장에 각인한 듯 울퉁불퉁한 글씨가 보이고 만져졌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종이 위에, 까만 글자 사이로 난 하얀 오솔길에 할머니는 밑줄을 긋고 뭔가를 썼다. 특유의 반듯한 글씨로.


1927년 태어나 아흔여섯 해를 살고 있는 신 여사는 늘 그렇게 좁은 공간 안에 일상을 남기고 마음을 적는다. 할아버지가 하늘로 떠난 날, 그녀는 뭐라고 썼을까. 큰손녀가 신랑감을 데리고 갔을 때, 첫 증손자를 봤을 때, 그때도 웃음과 눈물로 문장을 지었을 게다. 지극히 평범한 그녀가 수십 년째 이어온 기록 습관이 이리 귀한 줄 알았으면 할머니한테 좀 물어볼 걸 그랬다. 할머니, 뭘 쓰세요? 어떻게 만날 써요? 옛날에 쓴 건 읽어보셔요? 예전에 쓴 건 다 어디에 있어요? 넌 뭘 그런 걸 묻니, 할머니는 분명 빙긋이 웃으며 이리 말할 것이다. 어쩌면 이젠 본인이 글 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신 여사는 가계부를 다 보관하고 있을까. 수십 권은 족히 될 가계부는 내 할머니의 역사이자  산이다. 기록 부자인 그녀의 손녀인 게 더없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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