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시작하고 좋은 점은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홀로 쓰는 이는 독자를 만나고 같이 쓰는 이들은 글벗을 만난다. 쓰는 입장에선 독자보다 글벗이 낫다. 아직은 형태를 갖추지 않은 글을 쓰면서 내 글을 좋아해 줄 이들을 떠올리는 것보다 글 쓰는 고통을 공유하고 못난 글을 다독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게 일단 힘이 된다. 글쓰기라는 작업은 본디 고독한 일이라지만 때론 고독도 같이 씹어야 오래 버틸 수 있다.
글쓰기를 가르치다 보니 '선생', '강사',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사실 가르친다기보다는 돕는다는 마음이 큰데 그렇다고 하는 일에 대한 내 마음가짐을 매번 설명할 수 없어 불러주는 대로 둔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적확한 단어를 찾으려 애쓰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명칭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현재 가장 근접한 건 '글벗'이다. 누군가에게 내가 '글벗 1', '글벗 2'인 게 좋다.
지난 3년간 많은 글벗을 만났다. 각자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자유롭게 틈을 허하며 인연을 이어가기도 하고, 글 쓸 때마다 내가 떠오른다며 연락하는 이들로 반가움을 누리기도 한다. 글쓰기 열풍을 타고 ‘남들이 쓰니 나도 써야 할 것 같아’ 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쓰는 일을 멈춘 이들을 그리워도 한다. 다시 불을 밝히면 불나방처럼 찾아올까. 어떻게 해야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할지는 늘 고민이다.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빠르게 끓어오르는 양은 냄비처럼 쓰는 일에 강한 열정을 보이는 이가 있는 반면, 서서히 뭉근하게 열기를 이어가는 뚝배기 같은 이가 있다. 글 쓰는 목적과 필요에 따라 글벗들의 모습도 다양하다. 모두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글쓰기를 성장시키고 타인에게도 은은한 영향력을 주는 이들은 '뚝배기'과다.
70세 그는 전형적인 뚝배기였다. 이제껏 수업에서 만난 수강생들 가운데 최고령자. 하얀 머리칼, 돋보기안경, 지그시 감은 눈. 한눈에 봐도 살아온 시간이 길었을 그를 보며 처음엔 생각이 많아졌다. PPT나 강의자료 글씨 크기를 키워야 하나, 아직은 젊다고 생각하는 30, 40대와 함께 글을 쓰는데 불편하지 않을까, 글을 써 오라고 과제를 내주면 쓸데없는 것 시킨다고 성내지는 않을까. 결론적으로 내 생각은 기우였다. 수업 도중 이해되지 않으면 조용히 손을 들고 질문했고, 한글/워드 프로그램으로 글을 써서 메일로 보내는 방법을 수업 후 다시 확인했다. 무엇보다 켜켜이 쌓인 지층의 무게처럼 인생의 연륜과 경험은 결코 청춘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풍족해진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의 글과는 달랐다. 생존을 위해 피난길에 오르고 쑥을 캐며 허기를 달랬던 풍경이 아리지만 따스하게 묻어났다. 32년의 직장생활과 10년 넘은 투병생활에서 그가 겪었을 삶의 궤적에 숙연해졌다.
올봄, 나와 함께한 글쓰기 수업을 계기로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에 일상 사진과 짧은 글을 올리던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정리할 '자서전'을 마음에 품었다. 수업마다 내주는 글을 '숙제'처럼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썼다. 봄학기를 마치고 다음 학기가 열리기 전까지 수업에서 배운 대로 기억에 박힌 이야기를,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를 글감 삼아 쓰고 또 썼다. 가을이 되어 다시 만난 그에겐 인생 굽이굽이 희로애락이 담긴 글 50편이 쌓여있었다.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이것저것 알려드렸지만, 인생 선배인 그는 세 치 혀로 담을 수 없는 깊고도 너른 글로 나를 겸허하게 했다. 글쓰기를 마주하는 그의 태도는 두고두고 나를 돌아보게 했다.
"좋은 글은 좋은 삶에서 나옵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잘 살아야 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하루하루 일상 속에서 쓰는 글은 때로 시시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글쓰기가 열심히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글은 결코 삶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설레고 즐겁지만 피곤하고 두려운 일일 수 있다. 예상치 못하게 형성된 관계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신선함은 사라지고 고통만 남기도 한다. 감사하게도, 글쓰기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착하다. 글 쓰고픈 마음을 뚝배기처럼 간직한 채, 꾸준히 쓰려 애쓰는 이들은 참으로 선하다. 살아온 환경도, 나이도, 생김도, 생각도, 모든 게 다르지만 글쓰기라는 공통 주제는 사람을 겸손하고 따뜻하게 만든다. 올해 만난 글쓰기 동지들, 나의 글벗들은 적어도 그러했다. 마지막 인생길에서 뒤를 돌아보며 쓴 글이 아름다우려면 어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준 그는, 2023년 내게 선물 같은 최고의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