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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Sep 09. 2024

그래, 가자 1박 2일

여행이 꼭 길 필요 있겠어?

여름방학이 끝나기 바로 전, 두 아들과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개학 바로 전날이요. 혀가 쏙 빠질 만큼 무더울 때 '피서' 안 가고 왜 이제인가 싶지만, 저흰 사실 남들 갈 때 여행을 가지 않아요. 7월 말, 8월 초에 사람들이 산으로, 바다로, 비행기 타고 해외로 나가는 건 다 이유가 있잖아요. 한창 더울 때 바닷물에 몸 담그고 콧바람 쐬고 나면 남은 여름을 보낼 여유가 생기죠. 대신 많은 사람들과 경쟁하듯 숙소를 잡고 높은 가격에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맛집에 줄을 서야 해요. 아이들을 데리고 이렇게 하기엔 부담스러웠어요.


올해 여행이 늦어진 건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3학년 두 아들 때문이었어요. 공부 계획이 보통 촘촘해야 말이죠. 한창 공부하는 아이들이 있는 집에선 아무래도 모든 일정을 아이들에 맞추게 되잖아요. 학원 가지 않고 과외도 받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여행 가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개학 전까지 계획대로 공부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독서실로 직행하고 점심 먹고 또 공부. 저녁 해가 지면 둘이 나가 운동하는 일상의 반복. 올여름이 얼마나 더웠어요. 그 가운데서도 매일 책상을 지킨 아이들이 대견했습니다. 물론 매 시간 얼마나 집중했는지는 모르지만요.


요즘 명절마다, 황금연휴마다, 방학마다 여행 다니는 일이 당연해졌잖아요. 해외여행도 많이 가고요. 이에 비하면 저희는 여행을 자주 다니지 못하는 편이에요. 2년 전, 전라남도 강진이 마지막이었죠. 이렇게 여행을 자주 하지 않는 것을 두고 초등학생들 사이에선 '개근 거지'라고 한다면서요? 여행을 체험학습활동으로 대체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학교에 매일 등교하는 아이를 바보스럽게 여긴다고요. 그런 논리라면 우리 아이들이 이에 해당됐을 거예요. 네 식구 각자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코로나 이후 여행경비가 말도 못 하게 치솟았잖아요. 해외여행 가겠다고 네 식구 비행기 타려면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은 후딱 넘어가는데, 아이고, 저흰 언감생심 꿈도 못 꿉니다. 솔직히 아이들 데리고 해외여행 자주 다니는 분들을 보면 놀라우면서도 궁금해요. 들 그 많은 경비를 어떻게 감당하는지, 우리만 지극히 서민이어서 못 하나, 뭐 이런 생각도 들고요.


아이들이 가끔 여행 가고 싶다고는 해요. "엄마, 학교에서 만날 영어 배우는데 한 번 제대로 써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아이들은 여행 가지 못하는 상황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조하지 않아요. '개근 거지'라는 말이 붙기에 중고등학생은 바쁘죠. 아이들은 수업 빠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만큼 보충해야 할 과제와 시험 있어서 등교하는 게 여러모로 낫다고요. 비록 초등학생들 이야기라지만 근면 성실하게 개근하여 공부하는 것을 두고 '거지'를 붙인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전 아이들을 칭찬해주고 싶었어요. 지난 학기, 아이들은 등하굣길마다 차 안에서 곯아떨어졌고 코피를 쏟을 정도로 학교 생활에 열심이었어요. 방학마저 쉬지 못하고 공부했으니 2학기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면 곤란하잖아요. 잠시라도 아이들에게 선물 같은 쉼을 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슬쩍 물었죠. 시간 좀 내달라고, 곧 개학이니 2박 3일만 가까운 곳에 다녀오자고요. 실은 제가 시원한 바다를 보고 싶었어요. 여름방학 내내 외식 덜하고 배달음식 덜 먹고 집밥 해 먹이느라 턱 밑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거든요. 목에 땀띠가 다 났다고요.


노상 바쁜 남편에게도 부탁했어요. 남편은 목포를 가자네요. 목포라, 먼디, 그곳은. 그래도 가자는 게 어디인가요. 어디든 세 남자가 원한다면 기꺼이 따라가겠다고 했죠. 그런데 남편이 보내준 숙소를 보니 그럴 수가 없었어요. 비용을 따지는 남편에겐 가성비가 가장 중요한가 본데, 전 숙소만큼은 청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급호텔까진 아니어도 사각거리는 하얀 침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쩜 골라도 그런 곳을 고르는지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어요. 제가 나설 차례가 되었네요. "짧고 굵게 갑시다. 1박 2일 어때요? 대신 숙소 괜찮은 곳으로 가요."


그리하여 결정한 곳은 속초. 전 속초를 좋아해요.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시내엔 오래된 서점도 있어요. 집에서 3시간 안팎으로 이동 가능하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맛집도 얼마나 많게요. 갑시다, 속초! 두 아이들은 오케이 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남편, 결국 그를 버리고 가기로 했어요. 일정이 도무지 맞지 않았거든요. 무엇보다 그는 강원도를 싫어합니다. 군 생활을 강원도에서 해서 그는 '강' 자만 봐도 치를 떱니다. 산은 더 싫어해요. "그럼, 당신 빼고 우리 셋이 갈까요?"라고 던졌을 때 그의 눈이 반짝이던 것을 전 보았습니다. 강원도보다 회사가 낫다니. 건너 건너 강원도의  피가 흐르는 저는 강원도도, 산도 참 좋은데요. 아, 왜 그는 이 기쁨을 모를까요?

 

숙소는 바닷가 근처로 잡았어요. 남편이 나중에 가려고 눈여겨봐 둔 곳이었대요(강원도가 그리 싫다면서 바다는 괜찮더냐?). 아담하고 깔끔한 게 마음에 들었어요. 개학 바로 전날 가능한 방이 딱 하나 남아 있더군요. 옳다구나, 바로 예약했습니다. 미식가인 남편이 평소 찜해놓은 맛집 50개도 그의 핸드폰 안에 고이 저장돼 있었어요. 남편은 메뉴별로 정리해서 제게 보내줬습니다. 순식간에 후다닥 모든 게 세팅 완료. 바닷물에 발 담그고 맛있는 거 먹고 하룻밤 자고 오기! 사춘기 두 아이들 데리고 가기에 이보다 더 나을 순 없겠죠?


대신 조건이 있었어요. "엄마, 이번에 산은 안 가요. 바다만 가요." 3년 전 속초에 갔을 때 제가 설악산 바로 아래 숙소를 잡고 울산바위까지 산행을 강행했거든요. 속초 하면 설악산 아닌가요? 언제 또 설악산을 가보겠어요. 그런데 세 남자는 등반 시간이 길어져서 네끼 먹을 시간에 세끼밖에 못 먹었다고, 다리 아파 죽겠다고 저를 얼마나 닦달하던지요. 그때 남편과는 결국 싸웠어요. 물론 화해하긴 했지만 그 사이 두 아이들은 저희 눈치 보느라 호텔 로비를 서성였더랬죠. 부끄럽고 미안한 기억이에요. 이번 여행으로 아이들에게 만회할 기회가 생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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