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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Sep 16. 2024

이번 여름방학 완전 망했어

마음 상한 엄마와 사춘기 두 아들

며칠 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비록 남편은 못 가지만 우리끼리 재미있게 잘 쉬다 오자고 의기투합했는데 그사이 아이들과 부딪혔습니다. 왜 방학이 그렇잖아요.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붙어있다 보면 좋았다가도, 별 것 아닌 일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이 생기기도 하죠. 뭐, 그럴 수도 있지 슬쩍 넘어가는 날도 있고 그렇지 못해 목청이 높아지는 날도 있구요.


방학 중간중간, 아주 사소하지만 아이들이 제 의견에 귀 기울이고 따르지 않을 때마다 제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어요. 전 숨기지 못해요. 이날도 그랬어요. "니네 이번 여름방학은 완전 망했어."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애썼다고, 기특하다며 여행까지 기획해 놓고 이게 웬 변덕인가 싶을 거예요. 먼저 우리 집 이야기를 조금 해야 할 듯해요.   


아이들은 대안학교를 다녀요. 여기엔 여러 의미가 있을 텐데요. 일단, 아이들은 해외 대학 진학을 꿈꾸고 있어서 대다수 한국 중고등학생과 입시를 준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방학 동안 큰아이는 SAT(미국 수능시험), 둘째는 중졸 검정고시를 공부했어요. 이를 위해 학원을 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이 알아서 공부하겠다는데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어디 있겠어요. 옆집 아이나 할 법한 '자기주도학습'을 우리 집 아이들이 한다니! 학원비도 안 나가고! 완전 땡큐죠. 그런데 엄마 마음은 그게 전부가 아니더라구요. 혼자서 해낼 수 있을까, 그래도 황금 같은 방학 기간에 바짝 점수를 올리려면 경험 많은 전문가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 고2 여름방학을 시간만 흘려보내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했습니다. 아이에게 묻고, 또 묻고, 다시 한번 물었어요. "학원 보내줄까? 과외 선생님은 어때?" 반복되는 질문에 지친 아이가 나중에는 한숨과 함께 그저 한 마디 덧붙이더라구요. "아, 엄마. 괜찮아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사교육을 적극 활용하고픈 대한민국 부모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해요. '널 위해서라면 엄마는 백방으로 뛰어 이제껏 진학 성적이 좋은 학원, 훌륭한 선생님을 수소문해서 널 도와줄 수 있어!' 전 아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있잖아. 네가 모르는 약점을 전문가는 한 번에 알아봐. '원 포인트 레슨'이라고 하잖아. 결정적인 조언을 받아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네 공부에 탄력이 붙을 거야. 결국 시간 싸움이니 효율적인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니?" 논리로 무장했지만 아이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을 거예요. 자신의 진로에 대한 엄마의 두려움을요. 이번뿐이었겠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꽤, 자주, 두려움이 밀려들 때마다 제 입에선 관심을 빙자한 질문과 사랑을 덧입은 잔소리가 쏟아지곤 했어요.   

  

둘째의 이슈는 헤어스타일이었습니다. 아이는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중입니다. 아이가 마음에 든다며 찾아서 제게 보여준 사진은 갸름하고 곱게 생긴 어느 아이돌이었어요. "이처럼 길게 기르고 싶어요." 그땐 아이가 머지않아 '테리우스'가 될 거라고, 제가 생각했던 듯해요. 하지만 아이는 '머털도사'의 모습으로 아침마다 저를 아연실색케 했습니다.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이 목을 덮고 어깨까지 닿는데 볼 때마다 너무 괴로웠어요. 덥수룩하고 치렁치렁하다 못해 지저분한 헤어스타일은 아이의 머릿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어린아이가 한여름날 멋 부린다고 여우 목도리를 두른 느낌이랄까요. "아들아, 머리카락을 좀 자르면 안 될까?" "아뇨. 아직 더 기르고 싶어요. 엄마가 제 의견을 존중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좀 하면 안 돼요?" 


안 될 일 있나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들이라고 15년간 말해왔는데요. "머리카락을 길러서 지금은 좀 엄마 취향이 아니어도 넌 얼마나 사랑스러운데."라고 말해줘야 하잖아요. 하지만 아이의 땀 흐르는 얼굴과 퀴퀴한 냄새가 나는 목덜미 주변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턱 붙어있으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차올랐어요. 정말 두 콧구멍으로 분노의 증기를 내뿜는 기분이었죠. "그럼 좀 제발 묶기라도 하라고!!" 더위 탓이라고 해 둘래요. 제가 이성을 잃고 포효했던 건 더워서 그랬던 거예요. 분노 게이지가 솟아 둘째에게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며 아이의 감정을 건드렸죠.


저흰 일요일 저녁마다 가족이 둘러앉아요. 여행을 이틀 앞둔 그날 가족회의에서 결국 큰아이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웬만해선 울지 않는 아이인데 제대로 된 방법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어쩌냐는 제 말에 억울함을 호소하더군요. "엄마 아빠가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문제가 호락호락하게 풀리지 않아요. 왜 내가 푼 답이 틀릴까 이리저리 생각하고 다시 풀다 보면 하루에 수학 문제 3개밖에 못 풀 때도 있다구요. 그래도 개념 찾아가면서 다 알아냈어요. 그런데 오답노트를 끝까지 못 썼다는 이유로 제가 잘못하고 있다고 폄하하시면 어떻게 해요?" 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큰아이는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하면 돼요."라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편이거든요. 둘째 아이도 제게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엄마가 혼낼 때 빈정거리는 말투가 있어서 듣고 싶지 않아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그게 제 말버릇 중 가장 고쳐야 할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기분 나빴어요. 다 아이들 생각해서 애정을 갖고, 에너지를 끌어모아 한 말인데 정작 방향 잃고 허공에 흩어진 잔소리에 불과했던 거였어요. 게다가 아이들이 불편해하는 걸 이토록 모를 수 있었는지 어미로서 자존심이 상했어요. 한 길 사람 속 모르는 게 당연한 건데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만큼은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다고 착각했나 봅니다. 앞으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갑자기 막막해지더군요. 가족회의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엄마의 마음을 아이들이 몰라준다는 서운함, 이미 여름방학은 다 지나 이제 곧 개학인데 어떻게 하나, 하는 암담함이 몰려왔던 듯해요. 다음 날 아침, 잔뜩 부은 눈을 겨우 뜨고 그보다 더 부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했어요.


"나 속초 안 갈래요. 쟤들이랑 안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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