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둠 속에 차오르는 불평과 감사

딸깍, 스위치를 바꿔!

by 오르

"엄마! 시험 보던 중인데 정전됐어요. 컴퓨터가 그냥 꺼졌어요."

전기가 나갔다. 아파트 비상전력은 가동하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멈췄으며, 와이파이도 죽었다. 하필 아이가 온라인 수업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 바로 그 시간, 밤 9시 46분에 시험문제 17번을 풀 때 이런 사달이 일어난단 말인가.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3분의 2 이상 남은 상황. 쇠털같이 많은 날을 두고 아이는 왜, 굳이, 수업기간 종료 하루 전날 기말고사를 봐야 했던가. 미리미리 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었던가.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입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아니, 도대체, 이게 뭐야...!" 둘째는 풀이 죽어 말했다. "... 제가 이제 해결해 볼게요."


어둠 속에서 사태를 수습하려는 아이가 보였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필요한 건 책임 추궁이 아니다. 남은 시험을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이는 미국 대학에서 제공하는 AP수업을 듣는데 모든 강의와 시험이 온라인으로, 영어로 이뤄진다. 아이는 '어둠'을 촬영해 담당 교수와 학교 행정실에 [Urgent](긴급) 이메일을 보냈다. 갑자기 발생한 정전 때문에 시험을 마무리하기 전에 답안이 제출됐으니 다시 볼 기회를 달라는 요청이 골자였다. 당황하지 않고, 망연자실하지 않고 '그다음'을 헤쳐나가려는 아이. 대견하다. 불평과 원망, 걱정과 불안을 향하던 내 마음은 슬금슬금 안도와 감사, 기대로 바뀐다.


불평과 감사는 교묘하게 시소 탄다. 마음속 단 하나 있는 스위치를 서로 차지하려 다툰다. 어느 방향으로 스위치를 올리느냐에 따라 마음 상태가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지고 표정이 변하고 말과 행동이 바뀐다. 불평 스위치를 올리면 세상의 미세한 결함에 눈이 꽂힌다. 컵에 물은 늘 반만 차 있다. 나머지 반이 부족하다며 투덜거린다. 갈증에 허덕이며 더 채우려 기를 쓴다.


감사 스위치를 올릴 때 한 줄기 빛이 마음속 어둠에 길을 낸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모래알 같은 보석을 찾기 시작한다. '난데없는 정전이 당황스럽지만 아이가 절망하지 않잖아.', '이렇게 또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않겠어?' 평안할 때 드러나지 않았던 아이의 문제해결력을 마주한다. 무엇보다 전기가 나간 그 순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지 않던 게 얼마나 다행인가!


자그마한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평과 감사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다닌다. 어느 쪽에 귀를 더 기울일지, 스위치를 어느 방향으로 올릴지는 선택의 문제다. 상황을 주도하느냐, 현실에 끌려다니느냐. 우린 매일 팽팽한 주도권 싸움에 놓인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불평은 스멀스멀 올라온다. 반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불쑥 내게 등장할 때 감사를 찾으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드는 건 막을 수 없지만 둥지를 트는 건 막을 수 있다'는 마틴 루터의 말처럼 구시렁구시렁 입 안에 불평이 차오르기 전에 고개를 거세게 젓는다. 훠어이 훠어이 날아가거라.


별안간 불이 번쩍, 전기가 들어온다. 정전된 지 2시간 만이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반갑다. 시험을 치르는 중에 정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건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왜 하필, 그날, 그래야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최선을 다해 대처했고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적 반전 끝에 우리의 결론은 해피엔딩.


하루에도 수십 번 불평과 감사가 오간다. 불평이 또 다른 불평을 낳는 건 순식간이어서 매일 스위치를 바꿔본다. 가능하면 감사함에 오래 머물기. 양은냄비 같은 내 마음이 주물 솥이 되는 그날까지. 딸깍, 딸깍딸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