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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pr 23. 2021

아이에겐 배우는 기쁨이 있었다

"새로운 걸 배우면 머릿속이 꽉 차는 것 같아요"

"어머니, ㅇㅇ은 꼬리잡기만 해도 즐거워해요."


큰 아이 초등학교 1학년 첫 상담.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예상 밖이다. 학부모 경험이 전무한 초보 엄마의 긴장감이 훌쩍 날아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 아이에 대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끝없이 이어지던 고민이 멈춘다. 문득 내가 보아온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이 생각났다. 꼬리잡기 하러 운동장에 나가자는 선생님 말씀에 아이는 예의 그 눈빛을 보였을 게다. 


그랬다. 큰 아이는 학교 가는 게 그저 즐거웠다. 공교육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바닥을 친 지 오래라지만 아이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학교에서 배우고 행하는 모든 것을 재미있어했다. "너 이렇게 말 안 들을 거면 내일 학교 가지 마!" 어쩌다 내가 언성을 높이면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다. 아침마다 등교를 거부하며 부모의 혼을 쏙 빼놓고 엄마가 함께 나서야 겨우 학교 정문을 통과하는 아이들도 많다는데, 아이 학교 문제로 마음고생해 본 적 없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https://ec.europa.eu/


"학교가 왜 재미있니?"

"그냥 다 재미있어요. 친구들하고 노는 것도 재미있고 도서관 가서 책 보는 것도 재미있고 선생님이 뭔가 가르쳐주시면 그것도 재미있어요."

"수업이 재미있어? 선생님이 잘 가르쳐주시나 보구나."

"네. 몰랐던 걸 새롭게 배우면 그게 좋아요. 머릿속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에요."


배우는 게 재미있다니. 아이의 대답이 낯설다. 이제껏 살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내게 학교는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이었다. 학생으로서 성실하게 의무를 다하느라 '집-학교-도서관'을 돌며 공부했고 '좋은 대학'을 향해 달리느라 너무 바빴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학교가 즐겁고 배우는 게 신난단다. 학교에 대한 꿈과 환상을 심어준 적도 없는데 어찌 이리될 수 있었을까.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그저 놀았다. 숲유치원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을 뒤집어쓰며 뛰어다녔고 원숭이처럼 나무를 탔다. 멋진 나뭇가지를 보물처럼 들고 오는 날은 개선장군 부럽지 않았다. 비싼 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아쉽게도 숲유치원을 그만둔 후엔 동네 유치원을 다니며 축구, 태권도를 배웠을 뿐이었다. 집에선 좋아하는 책을 어른들의 입을 빌려 읽었고 매일매일 놀이터와 공원, 근처 산을 돌며 뛰어놀았다.


그러니 아이에게 학교는 새로웠다. 쓰기 숙제도 재미있고 숫자 놀이도 재미있었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하니 운동장에 나가 여럿이 꼬리잡기를 하는 건 더 신났을 게다. 알림장을 쓰는 일이 버거웠지만 아이는 나름 열심히 잘 '그려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가장 의아했던 건 정규 수업시간에 'ㄱ', 'ㄴ', 'ㄷ' 한글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알림장을 쓰게 하는 일이었다. 대다수 아이들이 이미 한글을 모두 익히고 입학한다는 전제 아래 실제 수업이 이뤄지는 듯했다. 마뜩잖은 일이었지만 아이가 학교를 즐거워하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누구나 한다는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은 게 나름 주효한 전략이었다. 미리 알아 공부가 편해지는 것보다 배움 앞에서 겸손해지는 게 아이의 성향상 더 필요하겠다는 게 우리 부부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내 아이가 행복하게 자랐으면 했다. 대한민국 교육 환경에서 주입식 학습으로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건 엄마인 나로 족했다. 공부 좀 못 하면 어떠리, 성적 좀 못 받으면 어떠리, 대학 좀 못 가면 어떠리.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게 더 중요했다. 본인이 잘하는 것으로 먹고살 수 있으면 좋고, 이를 통해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성장하면 공부는 필요한 때 어렵지 않게 해 낼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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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즐거움을 설파했던 공자는 논어 옹야편에서 "지식을 아는 자는 그것을 좋아하는 자보다 못하고, 지식을 좋아하는 자는 그것을 즐기는 자보다 못하다"라고 했다. 남보다 지식을 많이 채워 넣는 것보다 스스로 공부하는 기쁨을 깨우치는 게 아이도, 부모도 행복한 일이다. 공부의 대상과 목적이 내가 아닌 남이 되면 공부가 절대 즐겁지도, 오래가지도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중학생인 큰아이는 아직까진 알아서 공부한다. 숙제를 다 했는지, 시험공부를 다 했는지 내가 아들에게 묻는 건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끝냈다. 아이는 때때로 배운 걸 내게 설명해주기도 하고 공부하다 답답한 건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아직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묘미를 아이만큼은 평생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배우는 기쁨,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행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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