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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May 05. 2021

마지막 어린이날은 마냥 너그러워도 돼


둘리 지우개. 

어릴 적, 한창 인기였던 만화영화 '아기공룡 둘리' 속 등장인물을 지우개로 만들어 팔았다. 둘리, 도우너, 또치, 희동이, 길동이. 공룡도 들어 있었다. 캐릭터 그대로 섬세하게 표현됐고 초록, 노랑, 분홍 색감도 또렷했다. 연필 끝에 끼워 쓸 수 있게 구멍도 있었다. 캐릭터 4개들이 세트가 오백 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참 사고 싶었는데 못 샀다. 집에 지우개도 많은데 왜 그걸 사냐고 분명 엄마가 그랬을 거다. 지우개로써 기능 역시 크지 않을 게 뻔했기에 문방구를 지나다니며 눈독만 들였다.


내 맘을 알아차린 셋째 외삼촌이 돈을 줬다. 지우개 사라고. 어린이날 용돈이었다. 보물 1호가 됐다. 동생이 만질라치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책상 서랍 안쪽에 고이 모셔두고 매일 들여다봤다. 박스에서 꺼내 만지작거리다 다시 집어넣었다. 지우개로 쓰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피규어에 가까운 둘리를 어찌 망가뜨릴 수 있단 말인가.


푸르른 오월, 어린이날이다. 우리집 둘째는 초등학교 6학년, 올해가 어린이로 마지막 해다. 이젠 어린이날 선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쾌재를 부르는 아빠와 달리, 둘째는 아쉽다. '올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무기 삼아 소원 성취를 하겠다고 작심했다. 점심 메뉴는 스테이크, 선물은 축구화다. 


브런치로 먹겠다고 식당 오픈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세상에 부지런한 사람은 정말 많았다. 우리 앞으로 23팀 대기 중.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단다. 비싼 스테이크 대신 줄 서지 않아도 되는 -이라고 쓰고 보다 저렴한 이라고 읽는 - 곳으로 가자고 꼬셨지만 두 아들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그래, 우리가 스테이크를 자주 먹는 것도 아니고. 평소 가성비를 중시하는 우리 부부지만 오늘만큼은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대기를 걸어놓고 축구화를 사러 나섰다. 발이 쑥쑥 크는데 왜 굳이 고가의 축구화를 사는지 엄마인 나는 이해하지 못할 노릇이지만 아빠와 아들은 이럴 때만큼 대동 단결한다. 유명 축구선수 여럿이 신는 최신형 축구화라는데 아무리 들어도 내겐 낯선 이름이다. 남편은 어릴 적 유니폼 한 번 못 입어보고 축구화 한 번 못 신어본 한을 두 아들에게 풀곤 한다. 동대문 가면 2만 원 주고 비슷하게 생긴 걸 냉큼 살 수 있는데 굳이 10만 원 넘는 정품 유니폼을 사겠다고 해외직구로 한 달을 기다릴 이유가 뭐람. 세 남자가 행복하다니 눈을 질끈 감아버린 게 벌써 몇 년째다.



둘째의 마지막 어린이날 선물, 축구화


식당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축구화를 사고 티셔츠도 샀다. 아빠가 축구화에 너그러웠다면 엄마는 티셔츠 사는데 인심이 후하다. 후딱 세 벌을 계산했다. 어린이날이니까. 우리집 막내의 마지막 어린이날이니까. 보들보들 오동통한 손이 마냥 귀여워 둘째에게 말하곤 했다. "아들, 이 손은 안 컸으면 좋겠어. 엄마 손안에 쏙 들어오는 이 느낌이 너무 좋아." 다섯 살 아이의 손은 이제 나보다 더 커졌다. 엄마가 힘들어 보이면 아빠를 대신해 꼭 안아줄 정도로 몸도 커졌다. 아기 같았던 목소리는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다.


양 손 가득 선물을 챙겨 든 둘째 표정이 환하다. 올해 마지막 어린이날을 보낸 둘째에게 축구화와 스테이크가 평생 기억에 남으려나. 문득 나의 둘리 지우개가 떠오른다. 어린이날이라고 받은 선물이 꽤 있었을 텐데 이것만 기억에 남는다. 지금 어디 있을까. 쓸모 없어졌다고 버렸을까. 지금까지 보관했다면 완전 희귀템인데. 아이들이 보면 신기해할 텐데. 갑자기 행방이 궁금해진다. 언제 친정 가면 예전 내 방 책상을 뒤져봐야겠다.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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