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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ug 02. 2021

사춘기 아들의 살 떨리는 첫 면도

면도시키려는 아빠 vs. 그저 피하고픈 아들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인 첫째 아들은 자고 일어나면 키가 훌쩍 커 있다. 수염도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코밑은 이미 까뭇해졌고 턱에도 듬성듬성 털이 났다. 남자에게 수염은 매우 중요해서 멋진 수염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고 남편은 자주 말한다. 감사하게도 큰 녀석의 콧수염은 자리를 잘 잡았다. 슬슬 면도를 시작할 때가 됐다.


이제 좀 깎지?



아, 아직은 괜찮아요.


얼굴에 칼을 대는 게 두려웠을까. 아이는 생각보다 면도를 꺼렸다. 남편이 몇 달 전부터 면도를 가르쳐주겠다고 말했지만 아들은 완곡히 미뤘다.  "아빠, 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다음 주에 하면 안 될까요?" 마스크를 써서 아무도 자기 얼굴을 보지 않는다나. 이미 턱에는 수염 열댓 개가 가느다란 실가닥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영락없는 이방 수염.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자기보다 훨씬 길고 까맣게 수염이 난 친구도 아직 면도를 시작하지 않았다며 아이는 아빠의 레이더를 요리조리 피해 갔다. 자신의 털을 어찌나 아끼던지 보다 못한 남편이 강수를 뒀다.

자, 오늘 면도다!


냅따 선포를 한 남편은 마트에 가서 면도기와 쉐이빙 폼을 사 왔다. '장비'를 실물로 영접한 아들은 두 손을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편은 두 아들에게 면도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해왔다. "아빠가 아들에게 수염 깎는 법을 알려주는 건 중요해."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수염 깎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뽀얀 얼굴에 수염이 삐죽 나오기 시작했을 때 소년이었던 남편은 무척 당혹스러웠단다. 그저 부끄러웠고 숨기고 싶었다고. 아버지에게 차마 수염이 났다는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거렸다고 했다. 눈에 띄는 수염을 잡아 뽑기를 수차례, 하지만 들불처럼 번져가는 수염에 절망했고, 결국 아버지 면도기를 '몰래' 들고 어설프게 비누칠을 해 첫 면도를 해결했다. 남편은 '첫 면도'를 떠올릴 때마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른이 되는 관문을 홀로 통과한 기억이 늘 아쉬운 듯했다.


온 가족이 좁은 화장실에 모였다. 모두에게 첫 경험이었다. 우린 들썩였고 흥분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큰아이는 제단 위에 올려진 양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녀석, 긴장했군. 삐쭉 키가 솟은 아이와 덩치 큰 아빠가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녀석은 아빠의 지도에 따라 따뜻한 물을 코와 턱에 바르고 쉐이빙 폼을 조심스럽게 묻혔다. TV에서 보는 것처럼 잘 발리지 않아 당황하더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곤 이내 피식 웃는다. 남편은 아이의 얼굴에 면도기를 댔다. 날카로운 면도날 조심스럽게 살살 움직였다. 호기롭게 나섰던 남편은 보드라운 아이 얼굴 앞에서 자세를 낮췄다. 첫 면도에서 시뻘건 피라도 보면 낭패였다. 아이는 면도를 두려워할 게 분명했다.



"삭삭"

털 밀리는 소리가 사과 껍질 깎듯 상쾌했다. 둘째 아들은 그 틈을 비집고 서서 아빠와 형을 유심히 봤다. 몇 년 후 자신 역시 해야 할 일. 난 화장실 문에 겨우 발을 걸치고 휴대폰을 들었다. 이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사진으로 촬영했다. "아, 엄마! 이런 것까지 찍으면..." 사춘기 녀석은 카메라 들이대는 걸 끔찍이 싫어하지만 상관없다. 아들아, 엄마는 네가 겪는 모든 첫 순간의 떨림과 설렘, 풋풋함이 소중하단다.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시간. 아들도 분명 자신의 성장을 친히 기록으로 남겨준 엄마의 세심함을 후에 고맙게 여길 거다.


몇 개 안 되던 수염의 존재감은 꽤 컸다. 면도를 마치고 세수를 한 큰아이의 얼굴이 맑아졌다. 매끈해진 턱을 쓰다듬으며 아이도 비로소 환하게 웃는다. 해사한 아이의 미소에서 다섯 살 어릴 적 모습이 오버랩된다. 어느새 이리 커 버리다니.


생각보다 괜찮네요. 하하.


 인생 과제를 마친 남편의 표정도 편하다. 그날 남편은 2차 성장기를 겪었던 사춘기 시절이 외로웠다는 글을 SNS에 길게 남겼다. 아들에겐 외로움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내 아이들에게 전해줘야 할 여러 가지 중 하나를 끝냈다는 생각과 함께 아이가 내 곁을 떠날 시간까지 또 한 마디가 채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 중에 많은 일들이 생겨난다. 그중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나 겪는, 겪어야 할 일들이 있다. 그건 남자 아이건 여자 아이건 마찬가지다. 아이를 키우면서 오래전부터 생각한 일들이 있다. '내 아이들에게 어른이 돼가는 과정에서 겪게 될 몸의 일들을 작지만 소중하고 즐거운 축제로 만들어주자'


무심한 경상도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아들에게만큼은 살가운 아빠가 되고 싶은 남편. 심히 자신을 닮은 큰아들을 볼 때마다 '제2의 사춘기', '제2의 성장통'을 겪는 듯 힘들어하고 좌절하지만 이날만큼은 아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함께 하며 남편도 아비로서 성장한 듯했다. 우리 가족은 큰아이의 첫 면도를 신나게 즐겼다. 힘겨울 수 있는 사춘기가 축제처럼 지나간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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