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 Aug 17. 2021

검정고시, 설마 만점일 리가


형아! 나 이 문제 좀 봐줘.


중졸 검정고시를 끝내고 나온 큰아이에게 둘째가 시험지를 내민다. 하루 종일 시험 치르고 나온 형을 무척이나 기다린 모양이다. 둘째는 같은 날 초졸 검정고시를 봤다. "아들, 형 이제껏 시험 보고 와서 힘들 거야. 이따 집에 가서 해. 그리고 결과는 나중에 보면 알잖아." 남편과 나는 큰아이가 안쓰러워 둘째를 말린다. 그런데 이 녀석, 우리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엔 보다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들이댄다. "혀엉아! 이것만 봐주라. 맞았어? 틀렸어?" 둘째는 무언가 아쉬운 소리를 할 때 꼭 제 형을 '형아'라고 부른다. 덩치가 산 만한 사내 녀석이 말랑한 콧소리를 잔뜩 머금고 뿜어낸다. "혀어엉아!"


두 아들은 대안학교를 다닌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싱그러운 학창 시절이 더없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 무엇보다 바른 신앙 안에서 건강하고 단단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3년 전 공교육을 접었다. 남편과 나는 성실한 모범생으로 12년간 대학입시만 바라보고 달렸다. 학교를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남들이 정해준 선 안에서 묵묵히 그 시간을 보냈다. 오로지 좋은 대학, 크고 유명한 회사, 돈 많이 버는 직업을 동경하며 자랐다. 지극히 무미건조했다. 


나이 마흔이 넘어도 우리는 여전히 꿈이 무엇인지, 적성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힘겹게 살아간다. 아이들만큼은 우리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십 대 시절이 신나고 행복하기를, 성적, 대학에 매몰되지 않고 꿈과 비전, 사명을 찾아 마음껏 날아올랐으면 했다. 대학? 제 앞가림하는데 대학이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안 가도 괜찮다. 그저 하고 싶은 걸 찾아 신나게, 치열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게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라 믿었다.


2년 전 초졸 검정고시를 경험한 큰아들은 느긋했다. 아직 중학교 3학년 과정을 배우지 않았고 현재 학교에서 배우는 커리큘럼은 일반 공교육과 다르지만 과락만 면하면 된단다. 반면 인생 첫 '국가고시'를 치르는 둘째는 그렇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에게 이전 검정고시 기출문제를 건넸고 아이는 며칠 동안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열심히 풀었다. 모르는 문제는 아빠에게 묻기도 했다. 고 녀석 의외로 열심이었다.


혀엉! 이제 국어 봐주라. 이거 찍었는데 맞았어?


긴가민가 하는 문제 몇 개만 확인할 요량인 줄 알았더니 이제 아예 6과목 시험지를 모두 제 형에게 건넨다. "오, 이거 어려운데 맞았네! 제법인데?"

"내가 이거 딱 보고 4번인 거 같아서 찍었지. 나 똑똑하지?" 

평소 어휘력이 심히 부족한 둘째인데 신기할 정도로 정답률이 높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신났다. 한껏 커진 목소리가 차 안 가득 차오른다. 답을 찍는 요령도 나름 논리적이다. 이건 이래서 2번, 저건 저래서 1번이라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엉뚱하다. 어이없는 설명을 어찌나 당당하게 늘어놓는지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어댔다.


이건 틀린 것 같은데?


아, 오답 등장. 

둘째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 이거 아빠가 설명해줬던 건데. 아빠가 3번 답이 맞다고 했는데..." 남편이 난감해졌다. 아이가 기출문제를 풀면서 몰랐던 내용을 남편에게 물었는데 설명이 살짝 잘못됐나 보다. 하필 그 문제가 나오다니. 녀석, 문제 적중 능력까지 출중할 줄이야. 그 정도면 충분히 잘 봤는데 둘째 얼굴이 심드렁하다. "아, 난 형보다 잘 보고 싶었는데. 만점 받고 싶었단 말이에요."


웬 만점? 

우리 부부 중 누구도 아이들에게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문제 잘 읽고, 답 밀려 쓰지 말고 끝까지 풀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야무지게 만점까지 꿈꾸다니. 예상보다 꽤 열심히 풀었고 최선을 다했으니 잘 한 거라는 말을 줄곧 건넸지만 둘째는 아쉽기만 하다. 그나저나 진짜 아빠 때문에 유일하게 하나 틀린 거라면 큰일이다. 

"설마, 또 틀린 게 있을 거야." 

남편이 내 귀에 대고 슬쩍 말한다. 시험 결과는 이달 말에 나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춘기 아들의 살 떨리는 첫 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