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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l 08. 2021

필력이 좋다는 한 마디 때문에


필력이 좋군요.

대학시절, 부전공 필수과목 과제로 제출했던 리포트에 이런 코멘트가 달렸다. 이게 웬 일? 담당 교수는 깐깐하기 이를 데 없었고 자신의 전공생을 향한 애정이 남다르기로 소문났다. 제출 기한에 겨우 맞춰 'F'만 면하리라는 심정으로 써낸 리포트. 학점은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그 한 마디를 보는 순간, 가슴 떨렸던 기억만 생생히 남아 있다. 어쩌면 나도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 몰라.


살면서 읽고 쓰지 않은 적은 없었다. 가게를 운영하던 부모님은 늘 바빴고 뒤편 방에서 난 책을 읽었다. 전집을 사들이는 엄마와 이를 타박하는 아빠 사이에서 슬며시 책을 폈다. 웬만한 책은 서점 가서 읽고 오라는 아빠 말씀에 동네 서점을 들락거리며 매일 읽은 쪽수를 머리에 넣었다. 오늘은 52쪽까지, 내일은 53쪽부터. 가파른 언덕배기 도서관도 틈만 나면 들렀다.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책 광고를 읊조렸고, 뇌리를 떠나지 않던 '닥터스', '개미'를 사서 읽느라 밥때를 놓치기도 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배를 깔고 엄마가 쪄준 고구마를 먹으며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를 읽던 기억, 어릴 적 겨울방학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글짓기반'에 들어갔다. 꼭 해야 하는 일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글을 써 보겠다고 손을 들었다. 당시 담당 선생님은 '수필가'로 등단한 분이었다. 매일 선생님이 주는 주제로 공책 한 바닥을 써내면 선생님은 코멘트를 달아줬다. "요 녀석, 빨리 집에 가고 싶구나?" 어느 날 선생님은 글을 읽다 말고 나를 불렀다. "글에서 냄새가 나. 아주 급한 냄새." 친구와 놀기로 해서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갔던 날, 기가 막히게 들켜버린 날. 지금도 그때 선생님 표정과 말투, 교실 풍경이 그대로 떠오른다. 아, 글에서 냄새도 나는구나.


어린 마음이었지만 글을 잘 쓰고 싶었다. 대회 나가서 상도 타고, 학교 문집에도 수상 내역과 함께 내 글이 실렸으면 바랐다. 여중 시절, 글을 잘 쓰던 친구와 학교 대표로 독후감 발표 대회를 나갔다. 학교에선 그 친구가 1등 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대회 당일, 일정이 늘어지면서 내게 주어진 발표시간이 줄었고, 난 그 자리에서 원고를 수정해 강단에 섰다. 1등은 나였다. '발표를 짧게 줄인 덕'이라는 선생님 말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글이 아니라 발표 덕에 상을 탔다는 말, 글은 그 친구 것이 더 좋았다는 뉘앙스였다.


내게 글을 쓴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주어진 시간에 뚝딱, 글다운 글을 쓴다는 건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쓰다 지우다 쓰다 지우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시간은 날아갔다. 눈에 번쩍 뜨일 문장 따윈 내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잘 쓴다는 칭찬을 받고 싶었다. 욕심이 자랄수록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부담도 커졌다.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들은 어찌 그리 많은지. 언론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 있을 뿐 차마 '기자'를 생각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필력이 좋군요.


볼펜으로 흘려 쓴 한 줄 문장을 보고 난생처음, 내 인생을 글로 승부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방송학 전공 교수가 한 말이니 사탕발림은 아닐 거야. 글쓰기를 떠올리면 여전히 나이 든 여교수가 떠오른다. 나라는 학생이 있었는지, 내가 기자였는지조차 모를 그녀. 감히 펜 기자를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치솟게 만 그 한 마디. 그 때문에 글을 썼고 지금도 글을 쓴다. 세상살이는 정말 모를 일이다.



© kellysikkema,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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