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서사가 흔드는 파토스의 파도

상처를 공유하는 인간의 본능

by 발가락꽃

우리는 왜 타인의 상처를 볼 때 가슴이 더 열릴까?

‘파토스’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한국에선 특히 예술에서 자주 쓰인다.



파토스는 감정, 열정이란 의미지만 그리스어로는 '겪어보았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3요소로 로고스(이성), 에토스(화자의 신뢰), 파토스( 청자의 감정)를 꼽으며,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으로 파토스를 정의했다.



즉, “이성적으로 옳다”보다는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 포인트다. 이성적, 감성적임을 떠난 마음의 파도. 화자와 공명하는 것이 파토스다.



예술에서 파토스는 빼놓을 수 없는 말이다. 이 단어는 내면의 무언가가 느껴진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특정 작품이 밝다 해도 관객은 밝음만 보지 않는다. 어딘가 찾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며 작품을 보고 나서도 가슴속에 여운이 오래 머문다.



그건 작가의 깊은 내면의 상처, 그 상처를 통과한 생각들, 그리고 이것을 들어내는 진솔함까지. 이 모든 것이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관객은 작가가 보낸 파토스의 파도에 휩쓸려 작품 속으로 빠져든다. 그래서 예술 분야에서 “파토스가 있다”는 말은 ‘묘하게 끌린다’, 어쩌면 ‘너의 내면의 상처가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남의 상처에 흔들릴까? 누군가가 살짝 스치듯 보여준 상처는 내면을 본듯한 친근감을 형성한다. 사실 이런 솔직함은 현실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솔직하게 나에게 모든 아픔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한편으론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다르다. 예술작품 앞에서 관객은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이런 거리 두기는 작가와의 극적인 공감을 일으킨다. 그리고 작가의 솔직함은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관객은 작가가 보여준 상처, 그리고 상처의 고통과 상처로 남기까지의 세월을 동시에 공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기쁨에 공감하기보단 슬픔을 감싸 안을 때 더 많은 유대감을 느끼며 내면적 친밀감이 올라간다. 동일한 모양의 상처를 보면 선 듯 내가 가진 상처를 보여주고 공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형태의 감정의 공유는 치유 효과를 내기도 하며 내가 누굴 마음으로 지지하는 신뢰를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마음의 동요를 빠르게 이끌어 낸다.



사람들이 말하는 서사, 작품 외부의 작가의 삶도 이와 동일한 형태의 마음의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서사는 기쁨만 존재하지 않는다. 서사의 기본 세팅은 무너짐, 실패에 있다. 그 상처를 어떻게 아물게 했는지가 서사의 완성이다.


어쩌면 인간의 기본 본능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그 위로를 통해 공감받으며, 누군가의 힘이 돼 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