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을 잃는 용기에 대하여
불편함은 '개선'의 신호를 준다. 불편하다고 느낀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다들 사용하던 물건이 불편하다고 느껴져야만 개선 방향을 찾고 발명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건들은 이런 불편함이 준 선물이다. 바퀴의 발명, 스마트폰 등 전 세기를 막론하고 불편함은 변화를 가져다준다.
인간극장에 소개됐던 두더지 잡는 기계를 발명하던 아저씨는 진짜로 기계를 발명한 후 미국에 수출을 하면서 대박이 났고, 자기 집 차고에서 컴퓨터를 조립하던 스티브 잡스는 결국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다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을 만들었다.
불편함이란, 현실에 균열이 생겼다는 신호다. 그 틈을 보려는 사람만이 다음 시대를 준비한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와 법이 다시 정비되는 것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그것들이 '불편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청원을 올리는 등 힘을 모아 국회를 압박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성폭행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받거나, 스토킹이 단순한 사랑싸움으로 여겨졌던 시대가 있었다. 당시에는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로 인식했기에 아동 폭력행위가 훈육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졌었다. 아동학대 범죄에 살인죄를 적용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모든 행위는 악의 때문에 허용됐던 게 아니라 인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즉 제도의 불합리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국 세상이 바뀌는 건 "이건 이상하다"라고 말한 누군가 덕분이다.
질문은 불편함을 동반한다.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던지는 일은 언제나 누군가에게는 '말대꾸'로 들린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 다음 세대와 부딪히며 조금씩 불편함을 학습한다. 하지만 변화는 곧 익숙함의 상실이고, 익숙함을 잃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불편함이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누군가의 예민함, 누군가의 별남으로 치부되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누군가의 '다름'이다. 불편함을 피하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덕분에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내가 속한 사회를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시선이 세상을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불편함은 불안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건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불안정 속에서 변화의 싹이 틀 때도, 변화가 없을 때도 우린 불안함을 느끼고 이 정신적 불안함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곧 불만으로 변하고 만다.
많은 사람이 변화를 진화로 착각한다. 하지만 변화가 옳은 방향을 향하는 건 아니다. 열성이 발현되기도 하는 생명체처럼 사회도 꼭 진화해가지는 않는다. 작은 부분에서 많은 실수를 동반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라는 건, 시대라는 건, 늘 그랬듯 흘러간다.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본인의 예민함과 불편함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람을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