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다시 문화가 되는 순환에 대하여
컬처(Culture)는 문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어원 자체는 농업에 있다.
라틴어 colere(경작하다, 가꾸다)를 어원으로 하는 이 단어는 아직도 프랑스에서는 농업에 관련된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사로 컬처를 사용하면 "cultiver", 즉 재배하다, 경작하다는 의미인데, 사람에게 형용사로 사용되면(cultivé) 교양 있는, 지적이라는 단어와 의미로 바뀐다. 팜 퀼티베(femme cultivée)라고 하면 교양 있는 여성이 된다. 지식, 교양, 예술을 마음의 밭에서 자라게 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땅, 바탕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땅이라는 것은 태초에 주어진 것이며, 경작이 가능하도록 우리 공동체가 일궈낸 것이다. 거기에 심는 작물도 기후와 토양에 맞게 개발되어 왔다. 즉 이 모든 땅, 식물, 기후가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를 상징한다. 이것을 현재의 문화(culture)와 대입해 봐도 현상은 동일하다. 공통의 상식과 감각 위에 각자의 씨를 심는 것, 그것이 문화다. 우리의 바탕이 되는 것.
한국의 오이 씨를 아프리카에 가져가 키우면 기후와 토양에 따라 우리가 아는 모양과 전혀 다른 모양으로 자라난다. 황소개구리는 처음엔 생태계 교란종이었지만, 천적과 환경의 압력 속에서 개체는 몸의 크기를 줄이며 살아남고 있다. 이처럼 각 나라와 지역의 환경은 그 안에 존재하는 개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이는 문화도 마찬가지다. 문화는 개인이 자라나는 토양과도 같다. 그렇기에 문화는 개인에게 영향을 준다. 동일한 성향을 가진 개인이라도 문화에 따라 다르게 자라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종 안에서도 모두 모양이 다르듯이, 같은 문화에서 자란 개인도 모두 제각각의 형태와 사고를 가지고 있다. 당장 문화보다 작은 단위인 가족 안에서도 같은 DNA를 가지고, 동일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형제도 다른 사고와 다른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한 개인성을 문화에 심으면 특수한 형태로 발화가 된다. 그렇기에 동일한 문화권에서 자란 작가들의 작품이 개인성 아래에서 다른 형태로 뻗어나간다.
프랑스에서 작품을 칭찬할 때 가장 흔히 쓰는 극찬은 "오리지널(Original)"하다는 표현이다. '근원적', '최초'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그와 동시에 '남과 다름', '독창적', 혹은 '괴짜'라는 찬사로도 쓰인다.
아이러니한 점은, 여기서 말하는 "근원"이란 것이 보편적 뿌리가 아니라 개인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같은 사회 속에서 자라왔더라도 개인이 가진 경험과 감각은 서로 달라지고, 같은 뿌리(origin)에서 출발했더라도 각자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개인화(personalize)한다.
그래서 "오리지널 하다"는 말은 진정성과 독창성을 동시에 품는다. 사회 속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속을 독특하게 소화해 낸 개인의 표현. 곧,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특수성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결국 "새롭다"는 것은 무(無)에서 전혀 없던 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 기존의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시선을 통해 창조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들에게 많이 주어지는 찬사이기도 하다. 예술은 문화라는 토양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술의 개인성은 집단을 대표하기도 한다.
결국 개인들이 모여 문화를 만들고, 시간을 통과한 예술은 다시 문화로 환원된다. 결국 문화의 토양을 만드는 것은 다시 한번 개인이 되는 것이다. 개인성이 모여 다시 한번 특정 모양을 나타내는 집단성이 될 때 그것이 우리의 문화가 된다.
그리고 현재의 예술을 지키고 사랑해 줘야 하는 명확한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다시 한번 문화로 환원되어 우리의 토양을 구성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