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각 사이에서 예술을 믿는 법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화다.
밤, 목이 말라 마셨을 때는 그렇게 달고 시원하던 물이, 아침에 그 정체를 알고 나서는 도저히 마실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과연 이 물은 먹어도 되는 물이었을까, 아니면 먹으면 안 되는 물이었을까.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판단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해도 되는 것, 저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 거의 모든 행동에 앞서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감각과 감정을 통제하는 '이성'이 언제나 위에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옳기만 할까.
어두운 밤, 원효는 물이 무엇에 담겨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목이 마르다는 욕구에 따라 물을 마셨다. 날이 밝고 나서야 그것이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문제는 물의 상태가 깨끗했느냐 더러웠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담겨 있던 '그릇'이었다.
시각이라는 감각이 작동했다면, 물이 더럽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뼈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 불러오는 도덕적 불쾌감, 즉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내리는 모든 판단이 순수하게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감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성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단지 나의 감각과 욕망이 이성의 잣대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런 이성의 판단은 예술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작품을 보고 느낀 감정을 쉽게 믿지 못한다.
'이게 정말 좋은 걸까?'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게 틀린 건 아닐까?'
하지만 예술은 본래 감성을 건드리는 감정의 덩어리다. 그 순간 좋았다면, 그 감정은 거짓이 아니다.
원효가 목마름이라는 감각에 따라 마신 물이 그 순간 달았던 것처럼, 처음에 느낀 감정 역시 틀리지 않는다. 나중에 의미를 알게 되어 생각이 달라질 수는 있다. 좋았던 작품이 싫어지기도 하고, 싫었던 작품이 더 좋아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가 왜 이것밖에 보지 못했지"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처음 보면 낯선 몬드리안의 작업이 있다. 몇 년 후 미술사 책을 읽고 그 작가의 사고 구조와 탐구를 이해하고, 작품이 왜 시대적 의미를 가지는지 알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처음 봤을 때 낯설고 거부감이 들었던 감정이 거짓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경우,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며 그 감정을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좋았다"라고 느낀 내부의 감정을 다시 이성으로 환원해, 그것이 정말로 '맞는 판단이었는지'를 확인하려 한다. 그다음 내 감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하지만 감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좋았던 이유가 작가의 의도나 사회적 해석과 다르다고 해서, 그때의 감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때도 맞았고, 지금도 맞다. 단지 바라보는 층위가 달라졌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