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함이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들

AI가 예쁜 세상을 만들 때, 예술은 인간을 말한다

by 발가락꽃


풍족한 먹거리는 우리에게 날씬한 몸매의 선호를 가져다줬다. 예전에 소위 말하는 없던 시절, 너무 마른 몸매는 빈곤의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적당히 살집이 있는 몸매가 선호되었지만, 먹을 것이 널렸고, 패스트푸드와 값싼 공장제 음식들로 살이 찌기 더욱 쉬운 지금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 자기 절제가 안 되는 사람이 뚱뚱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러한 인식은 사실 선호도인 것이지 이것이 직접적인 '건강'과 관련이 있진 않다. 각자 자기에게 맞는 적정 몸무게는 다르다. 체형에 따라 뼈대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마른 것이 건강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마른 것=건강한 것은 아니다. 적정 몸무게 안에선 건강하다. 예전의 건강 기준과 지금의 건강 기준이 달라진 것도 없을 텐데, 건강하다고 하는 몸매가 변했다.



이런 것은 취향의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 뇌가 마음에 드는 것,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회적 합의를 '건강하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가져야만 아름답다고 했다. 현실을 모방하며 현실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최소한의 터치로 최대한 현실과 가깝게 만들어낸 작품들이 미술관에 주를 이뤘다. 하지만 사진의 발달, 대량생산이 가능한 사회로 진입하며, 미술은 또 한 번 전환점이 온다.



여기도 저기도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움" 대신 다른 형태의 "아름다움"을 택한 것. 여기저기 널려 있는 아름다움은 다시 한번 피로를 야기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다시 한번 흔하지 않음으로 방향을 틀었다. 작가들은 기존의 것과 다른 아름다움, 여러 가지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고 발굴해 낸다.



그렇기에 작가들이 포기한 기존의 아름다움은, "기존 예술 문법"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난해함을 선물한다.



왜냐하면 이런 흔하지 않은 다른 형식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외형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의 감정일 수도, 하나의 상황일 수도, 특정한 시대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보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의미를 해석해야 하고, 관객에게 요구되는 사고를 해야 한다. 그렇게 관객의 자리가 커질수록 어쩌면 더 난해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난해함은 우리에게 정형화되지 않음을 돌려준다. 기존의 유일한 '미()'를 버리고 다양한 아름다움을 선물해 준다. 그래서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여러 기준에서 모두 아름다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결국 예술은 사람에게 하나의 치유를 준다. 내 안의 아름다움, 각자의 지평이 다르고 그 안에 아름다움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대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우리의 강박을 내려놓게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한 번 '아름다움의 범람' 앞에 서 있다.

AI로 인해 더 많은 "아름다운" 이미지가 생겨나는 세상이 도래했다.



아름다운 사진들은 늘어나고 AI에 프롬프트를 넣기만 해도 나를 닮은 어여쁜 사람이 뚝딱하고 나온다. 나 자신이라고 착각할 만큼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에 실망하고 만다.



이런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무장된 AI의 세상에서 예술은 사람을 말하고 그렇기에 사람을 지킨다.



이런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무장된 AI의 세상에서 예술은 사람을 말하고 그렇기에 사람을 지킨다.

우리는 본디 아름답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한다. 이것이 우리가 AI 시대, 미()의 범람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하나의 출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