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12

by 강윤미

겨울이 오면 영화 <러브레터>를 본다. 눈밭에 누워 있던 여자가 옷에 묻은 눈을 훌훌 털고 일어서서 무릎까지 차오른 눈을 성큼성큼 밟으며 걸어가는, 영화의 시작을 좋아한다.


시작이 좋은 영화는 끝도 좋다. 도서 대출 카드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코끝이 시큰해지는 여자의 표정이 좋다. 그 장면이 없었다면, 여자는 남자아이의 마음을 모르고 살아갔을지 모른다. 모르고 지나가서 평온한 인생도 있다. 뒤늦게 알아버린 남자아이의 마음과 그가 이미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이 중첩되면서, 영화는 제목 ‘러브레터’처럼 일방적으로 보낸 편지가 된다. 봉투를 열어서 읽지 않는다면, 영원히 편지는 ‘모르는 마음’으로 박제될 것이다. 어쩌면 그러길 바라면서 편지를 보내는 마음도 있다.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혼자 간직하고 싶기도 한 이중적인 마음. 짝사랑은 어긋난 채로 완결되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음악도 있다. 이 영화 속에 흐르는 잔잔한 정서, 이를테면 ‘나는 너를 좋아한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감수성을 좋아한다. 여자아이의 얼굴에 종이봉투를 덮어씌우는 장면, 자전거 불빛으로 틀린 영어 문제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장면, 이유를 말하지 않고 책을 대신 반납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 좋아하는 마음 바깥에서 이상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중학생 남자아이의 마음. 음악은 서정적이고 간결하다. 영화 속 도시 오타루에 내린 눈 같다. 눈처럼 간결한 것은 없다. 눈은 내리면서 사라질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것들은 몸에 가벼운 것만 지닌다.


뒤늦게 알게 된 마음이어서 잘 지내냐고 묻는 평범한 안부에 여운이 깃든다. 이 영화는 슬퍼지라고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영화는 죽음을 외롭게 하지 않는다. 없는 주소로 보낸 편지가 누군가에게 건네진 다정을 보여줄 뿐이다. 마음이 가닿지 못할 곳은 없다.



2025. 12. 28 방송.






전주 MBC FM 99.1 MHz, <블루 레코드>방송. 일요일 오후 6시.

<러브레터>라는 코너를 통해 강윤미 시인이 쓴 짧은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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