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다음엔 무엇 21
나는 만삭의 여자였다. 출산예정일을 한 달 남짓 남겨놓고 있을 때 신문사에서 전화를 받았다. 문화부 기자는 인적 사항을 확인했고 나는 얼결에 대답했다. 대답하고 나니 알았다. 신춘문예 당선이 된 것이다. 조만간 신문사로 왔으면 좋겠다는 기자의 말에 만삭의 배를 이끌고 기차와 택시를 타고 신문사로 갔다. 신문사에서 사진을 찍고 간단한 인터뷰를 하고 돌아왔다.
아이는 예정일보다 일주일 먼저 태어났고 그날은 신춘문예 시상식 전날이었다. 나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출산 소식을 알렸다. 남편이 수상소감을 하고 상패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신문에도 났다.
20대 나의 목표는 오로지 등단이었다. 스물 몇 살 때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몇백 명에서 많게는 천 명이 넘는 응모자 중에서 최종심에 오른 몇 사람의 이름만 확인할 수 있는 신춘문예. 12월이 오면 신문사마다 원고를 투고하고 당선 전화를 기다리느라 긴장하고 절망하며 새해를 맞이하곤 했다. 그런데 큰 아이가 내 몸 안에 있던 그해 당선 전화가 온 것이다. 그리고 다른 신문사 세 군데의 최종심에 내 이름과 내 시가 언급되어 있었다. 아이가 내게 준 기적이라 믿고 있다.
어쨌거나 ‘엄마’라는 이름과 ‘시인’이라는 이름을 동시에 얻은 그해, 아이 젖을 물리다 꼬박꼬박 졸면서 시를 퇴고하느라 난 참 고단했다. 이름 앞에 새로운 이름이 붙고 불리는 일은 그만큼의 책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난 두 개의 이름을 저울질하다 ‘엄마’라는 단어를 조금 더 무겁게 선택했다. 아이는 당장 배고프다고 울고 보채지만 시는 입이 없었다. 아이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둘째 아이까지 낳고 젖을 물리느라 8년 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시를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잘살고 있다고 다독였다. 그리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낮엔 분명히 그랬는데 깜깜해진 방에 누워 있으면 시 쓰는 법을 잊어버릴까 전전긍긍했다.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온전히 믿지 못하는 시를 잠에 쫓겨 겨우 퇴고하며 발표하는 일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새로 쓰지 못하고 등단하기 전에 써둔 시들로 온전히 그 시간을 버텼다. 쓰지 않는 내가 ‘시인’이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 괴로웠다. 나는 여전히 시인이 되지 못한 것 같은데 청탁 전화를 받는 것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내가 아이보다 시 마중을 먼저 갔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내가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아이의 입안에서 이가 나고, 걸을 때가 오면 걸어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내 품 안에 두고 오래 젖을 물린 아이들이 건강한 시가 되어 내게 돌아오기를 나는 기다린다. 오지 않고는 못 버틸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에도 고향 밤의 별은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