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게세

보르게세에서 읽는 시 20

by 강윤미
보르게세.jpg 그림 JAB KIM





보르게세




강윤미



손을 잃어버린 것처럼

두 손바닥으로 혹은 열 개의 손가락으로

눈을 덮고 있으면 보르게세 공원의 푸른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네


이제 사진 속에만 있는 세 살의 아이

얼룩말을 발음할 수 없었던 아이와 공원 벤치에서

보르게세 미술관 입장 시간을 기다렸지

보르게세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렀던 보르게세 공원이지만

보르게세 보르게세

발음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엉뚱한 소용돌이가 쳐서

아이가 로마에서 훌쩍 다 자라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지

그림 그림이 벽마다 벽의 벽마다 벽을 빼앗을 듯 걸려 있었지

한꺼번에 찾아든 명화의 행렬에 현기증이 나고

아이와 나는 한국어로 소리쳤네 아무도 못 알아들어서

나는 아이에게 욕을 가르칠 수도 있었지만 보르게세 보르게세

말의 낯선 부드러움에 반해 그림 속 아이를 안은

귀부인처럼 아이를 훔치고 말았네

시차를 이기지 못한 아이가 팔꿈치에 얼굴을 대고 잠에 빠져들고

나는 가장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을 잡고 편지를 그려놓았네

연약한 구름이 훌쩍 자라 내가 사는 곳으로 당도할 때쯤이면

아이가 보르게세 공원의 나뭇잎 냄새를 맡으며 비 냄새를 읽을 것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비밀 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