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 기댄 시간

당신 다음엔 무엇 51

by 강윤미
문장에 기댄 시간.jpg 그림 metaphor




문장 아래, 연필로 그어 놓은 선들. 그 선을 비껴가서 나는 옆 문장에 색연필로 선을 긋는다.


온라인 중고 서점에서 주문한 책의 상태는 ‘상’이었다. 나는 ‘최상’ 상태의 중고 책을 주로 사지만 그 책은 출간된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중고로 나온 책이 그 책밖에 없었고, 요즘 내가 자주 즐겨 읽고 있는 에세이 시리즈의 한 권이었으므로 얼른 읽고 싶은 마음에 ‘상’의 상태임에도 구매했다. ‘상’의 기준 중에 ‘밑줄’은 없었다.


책은 사용감은 아주 조금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깨끗했다. ‘상’의 기준에 흡족할 만 했다. 아이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동안 나는 옆방에서 책을 펼쳐 들었다. 낯선 저자는 내게 낯익은 듯 말을 걸었다. 읽다 보니, 연필로 그어 놓은 자국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연필로 그어놓았다가 지우개로 지웠던 흔적. 책을 읽는 동안 충분히 감명하며, 적잖이 공감하며 줄을 그었을 그 흔적들을 서점에 팔려고 지우개로 지웠으나,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었던지 그만하면 충분하다 여겼던 건지, 어쨌거나 지우개로 지울 때 손에 힘을 주지 않아 남아버린 그 연한 긴 줄들.


내가 읽는 동안 옆 테이블의 당신이 내게 와서 말을 걸었지. 이 문장을 나는 좋아했어. 당신은 어때? 나는 고개를 저었지. 그건 평범해서 줄까지 긋고 싶진 않아. 나는 그 옆 문장이 훨씬 좋은데, 당신은 어때?


우리는 한 권의 책에서 만난다. 판타지 영화 속 장면이었다면, 처음 만난 우리는 책 속 글자에 뒤덮인 방에 앉아 당신은 연필, 나는 색연필을 들고 각자의 문장에 긴 줄을 긋고 있을 테지. 줄을 그을 때 별똥별이 떨어지는 장면이 오버랩되고 기찻길의 긴 줄이 생각나거나 길고 아늑한 곡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철새들의 행렬이 흘러나올 테지.

우리는 마침내 같은 문장에서 만난다. 당신의 연필 위에 나의 색연필이 지나간다. 당신의 연필은 연해지면서 진해진다. 색이 당신의 마음에 불쑥 찾아든다. 당신은 당황스러우면서 쿵쿵거린다. 나는 반가우면서 조급해진다. 나 혼자 알아야 할 문장을, 당신이 빼앗고 책 밖으로 달아나 버릴까 봐.


분명 나는 값을 지불하고 책을 샀으므로 책의 주인이 되었지만, 당신의 입김은 당신의 책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연필을 들고 있었다. 그 마음들을 어찌하려고 서점에 팔아버렸단 말인가. 조금 홀가분해지려고 지우개로 지우려 했던 말인가.


우리 둘은 만났지만 어긋났다. 나는 당신의 과거를 샀고 당신은 당신의 미래를 보기 위해 시간 여행자처럼 내 책 속에 불쑥 왔다. 나는 낯선 저자의 말을 경청하다 당신의 옆모습을 보고 당신의 얼굴을 본다. 우리는 저자의 말을 나눠 갖고 그 단어들로만 이야기한다. 각자 가진 문장으로만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같이 부둥켜안은 그 문장쯤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문장의 마침표는 나의 어깨에, 당신의 뺨에 점을 남긴다.


글 쓴 당신은 모르는 사람인데, 나는 멋대로 친구 삼는다. 밑줄 그은 당신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는 제멋대로 싱거운 사람이라 여겨버린다. 이렇게 책을 쉽게 팔아버릴 거면서 왜 흠뻑 빠져들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밑줄을 그어놓거나 도장을 찍어놓은 책은 팔기 어렵거나 최하 등급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안다. 나도 책을 팔려고 서점에 갔었다. 못 판 책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밑줄을 그어놓았거나 도장을 찍어 놓은 책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그런데 그걸 잊고 서점으로 갔었던 나도 참 싱거운 사람이다.


어느 날 책을 팔아버려야겠다고 마음먹어 버렸을 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집에 너무 많아 겁에 질린 날이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고 마음 쏟은 책과 음반과 옷과 그릇과 식물들. 이 모든 것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어서 벅찬 날이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마음 쏟아주는 그 무언가를 갈망하던 날이었다. 내가 돌보는 것 말고, 누군가가 나를 돌봐주는 것. 말똥말똥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쳐다보는 아이가 됐으면 하는 일. 내 의지 없이 누가 나를 어느 시간 앞에 데려다주고, 어느 공간 속으로 밀어 넣어줬으면 하는 것.


결정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온종일 무생물처럼 보내고 싶은 날, 그런 날이었다고 나는 짐작한다. 내 마음 하나쯤 사라져도 상처받지 않고 쓰라리지 않았으면 하는 날. 그런데, 밑줄을 긋거나 도장을 찍은 책은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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