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고, 걷는 만큼 쌓이는 제주의 조각들

제주 여행7: 제주를 공부한 날

by 멋진여름

01. 시골 병원에서 느낀 정겨움

그저께 비를 맞은 탓일까. 코가 막히고 으슬으슬한 게 전형적인 감기 증세다.

어제 약을 먹어보았지만 차도가 없어 결국 숙소 인근의 시골 병원을 찾았다.

시골 병원은 참 묘한 매력이 있다. 내과와 외과가 경계 없이 섞여 있는 풍경이 정겹고 재밌다.

설명도 없고 주사실로 가라고 했다. 그것도 정맥주사로.


02. 4·3의 아픔과 해녀의 삶, 조각이 맞춰지다

병원에서 나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4·3 평화공원이었다.

주사 때문인지 약기운 때문인지 살짝 졸음이 밀려왔다.

마침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평화공원 내 기록들을 읽어 내려가는데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서둘러 차로 돌아가 패딩을 가져와 입었는데, 그게 오늘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옷을 껴입었는데도 쌀쌀함이 느껴질 만큼 공기가 차가웠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기록과 영상, 안내판을 정독하며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어제 본 해녀 박물관의 기록들과 더불어 머릿속에서 비로소 하나의 조각으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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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31년의 시간 삼다수 공장 견학

중간에는 제주 삼다수 공장 견학을 다녀왔다.

늘 궁금했다. '저렇게 물을 뽑아 쓰면 고갈되지 않을까?', '어떻게 저렇게 깨끗할까?'

한 시간 남짓의 견학은 그 모든 의문을 시원하게 해결해주었다.

우리가 마시는 삼다수는 중산간 400m 이하에서 끌어올린 물인데, 지하수의 고작 0.09% 정도만 사용하기에 고갈 걱정은 크게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지금 마시는 물이 사실 31년 전에 내린 빗물이라는 사실이다.

제주 산간에 내리는 연간 5,000mm에 가까운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3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정화되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라벨지의 유통기한이 최대 2년인 이유, 물의 등급에 따라 그 기한이 조정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니 생수병 하나가 달리 보인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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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숲길의 긴장과 벚꽃의 아쉬움

이어 찾은 사려니 숲길. 아이들 아주 어렸을 적 친정 부모님, 남편과 함께 왔던 곳이다.

그땐 너무 덥기도 했고 편백나무 숲보다 별로라는 생각에 금방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비가 오락가락한 덕에 시원해서 쭉 걸어보려고 남편이 가져온 비옷을 챙겼다.

그런데 사람이 적었다.

무장애 데크길을 걷다 삼나무 길로 들어섰는데, 문득 뒤를 따르는 빨간 후드티의 남자를 보고 긴장이 되어 신경이 곤두섰다.

먼저 앞서가게 한 뒤 뒤를 돌아보니 아까 보이던 부부도 사라지고 없었다.

괜히 혼자 덜컥 겁이 나 결국 사려니 숲길 입구로 발길을 돌렸다.

혼자 하는 여행에선 가끔 이런 긴장감이 찾아온다.

아쉬운 마음에 지난주 일요일에 덜 피었던 벚꽃을 확인하러 유채꽃 프라자로 향했다.

하지만 어제의 거센 비바람 탓인지 벚꽃은 여전히 50% 정도만 개화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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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해녀박물관에서 맞춰진 퍼즐

사실 해녀 박물관은 세 번째 방문이다.

처음엔 그저 그들의 삶이 신기했고, 두 번째는 안내문을 꼼꼼히 읽으며 내용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방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녀들의 '고달픈 삶'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해녀는 그저 바닷속에서 전복, 소라를 캐고 미역을 채취하는 분인 줄로만 알았다.

그들은 독도까지 원정 조업을 가고,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태며, 제주 기반 산업을 일구는 데 자금을 댄 강인한 주체였다.

밭일을 병행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물질 후 곧장 밭으로 향하는 그 고된 노동의 연결고리를 이제야 이해했다.

추운 물속에서 나와 불턱에 앉아 몸을 녹이다가도, 남편이 데려온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했던 삶.

저체온증과 숨병을 달고 살며 나이가 아닌 깊이 갈 수 있는 기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뉘어야 했던 치열함.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서 보았던 단편적인 모습들이 선명한 현실로 다가온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서야 주차장을 나와 세화 해변과 별방진, 하도 철새 도래지까지 차로 훑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06. 놓친 주식과 올레길 1-1 도전

저녁 메뉴는 첫날 장봐온 양배추와 남편이 사다놓고 간 제주 삼겹살, 구좌 당근, 그리고 무화과 요거트다.

제주의 맛이 가득 담긴 식탁이다.

어제 사려고 걸어두었던 주식 두 종목이 겨우 10원, 100원 차이로 체결되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두 종목 모두 10%나 급등해 있었다. 아쉽다.


저녁 먹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내일 아카자봉 1-1 우도 코스를 신청했다.

이곳 제주에서 마음도 몸도 편안해진 탓에 살이 좀 붙었다.

이제는 좀 더 걸어야 할 때다.

여행 계획을 꼼꼼히 짜왔지만, 아침 날씨에 맞춰 즉석에서 일정을 세우는 'JR 언니'식 여행이 제주에는 더 맞는 것 같다.

내일은 우도의 바람을 맞으며, 오늘 배운 제주의 조각들을 다시금 되새겨보려 한다.


아직 글쓰기가 익숙치 않아서 사진을 많이 넣어보기도 하고 소제목을 넣어보고 여러가지 도전중이다.

지금까지 여행에서 한 가지 아쉬운 건 제주의 일몰을 보지 못했다는 것.

제주의 날씨는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해가 뜨다가도 갑자기 구름이 덮이고, 세찬 바람이 불다 비가 오고, 그러다 다시 맑아진다.

외출을 포기할까 싶다가도 막상 문을 나서면 비가 멈추는 식이다.

밀당하는 연인 같은 날씨 속에서 오늘은 '제주를 공부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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