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9천 보의 걸음, 당연하지 않은 행운

제주 여행8: 올레길 1-1 우도

by 멋진여름

두 번째 우도다.

14-15년 전쯤 와보고, 늘 오고 싶었지만 제주엔 볼 곳이 너무 많아 이제야 다시 가게 되었다.

어젯밤,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성산항에서 우도 가는 배를 타는 순간 그 예감이 맞았음을 알았다.

적당히 불어주는 바람은 걷기에 더없이 좋았다.


오늘 우도 올레 1-1코스를 걷기 위해 어젯밤 '아카자봉(가이드 동행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9시 30분 배를 타야 하는데 네비를 잘못 찍어 성산일출봉으로 가는 바람에 마음이 급했지만, 다행히 9시 17분에 도착해 표를 끊었다.

성산항에서 왕복 승선권(11,000원)을 끊고, 승선 신고서도 2장을 작성했다.

우도엔 항구가 두 개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천진항은 수심이 얕아 썰물 때 배를 댈 수 없어서 운항이 일찍 마감된다고 한다.

오늘 천진항은 오후 1시 30분 마감.

그래서 오늘 우도 걷기는 들어갈 때도, 나갈 때도 하우목동항을 이용해야 했다.


유채꽃과 청보리밭, 물질하는 해녀와 작살로 문어를 잡아 올린 어부의 모습까지 다양한 우도의 모습을 봤다.

특히 청보리밭이 장관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보리 잎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살랑거리는데, 그 모습이 꼭 초록색 물결 같았다. 보리 잎끼리 스치며 내는 '사각사각' 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왔고, 햇빛을 받은 연두색 잎들이 반짝이며 물결치는 모습은 마음에 가득 찰 만큼 싱그러웠다.


올레길 중간에서 식당 '해와 달 그리고 섬'에 가게 되었다.

아카자봉 선생님이 맛있다고 하셨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오늘 고기가 많이 잡혔다며 내어주신 5천 원짜리 회덮밥은 회 정식이라 해도 믿을 만큼 푸짐했다.

다만, 그날 고기 잡히는 상황에 따라 1만 원이 될 수도, 2만 원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밑반찬은 깔끔했고, 특히 땅콩 조림은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최고였다.

다음에 다시 우도에 온다면 이 집만은 꼭 다시 들르리라 다짐했다.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은 6천 원.

산방산보다 비싸고 맛도 덜했지만, 우도에 왔으니 한 번쯤 먹어줘야 예의인 것 같아 기꺼이 사 먹었다.

4천 원이면 딱 적당할 것 같은데, 여행지니까 그러려니 한다. 솔직히 브라보콘 맛처럼 느껴졌다^^


함께 걸은 8명의 일행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미 올레길을 몇 바퀴씩 돌았다는 분도 계셨다.

가이드님은 육지 사람들이 제주가 너무 좋아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를 하다 정착하게 된다며 웃었다.

그들 틈에서 나는 젊은 편이었지만, 딱히 대화 주제도 없고, 혼자 이 자연을 느끼고 싶어서 조용히 말없이 걸었다. 일행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한 길이었다.

어느덧 만보기를 보니 2만 9천 보.

평소 1만 5천 보만 걸어도 아프던 다리가 풍경에 취해 이만큼이나 왔다.

숙소로 돌아와 빨래를 마치고 무작정 월정리 해변으로 향했다.

해가 지는 찰나,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보이는 태양은 크고 뜨겁고 강렬했다.

비록 월정리에 도착했을 땐 구름이 해를 가려버렸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오는 길 내내 해가 조금씩 떨어지는 걸 충분히 봤기 때문이다.

예전에 월정리에서 완벽한 석양을 본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새삼 깨달았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매일의 일들이 사실은 모두 행운이었다.

여기 머무는 동안 오늘 처음으로 석양을 봤다.

그리고 차에 짐을 가지러 가면서 보름달도 봤다.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 해진 이후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기에 처음 봤다. 달도 예쁘다.


기념품 샵에서 동백 손뜨개 브로치를 하나 샀다.

지난번 남편이 왔을 때 산 동백 스카프와 함께 오래도록 제주의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다.

남편이 평소 검소하여 답답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잔소리가 늘어나 자꾸 거슬렸다.

하지만 오늘 올레길을 걸으며 나의 이 자유는 남편의 협조와 절약 덕분에 완성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렌터카 사고 때도 침착하게 처리해 주고 나를 응원해 주는 남편이 참 고맙다.

엄마의 사고 앞에 의연하게 대처해 준 큰아이도 대견하다.


나이 드니 주름도 늘고 피부 윤기도 사라져 못생겨졌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나이 들수록 못생겨지니 옷이라도 잘 입어야 한다지만, 나는 지혜가 생기고 감사함이 커지는 이 과정이 나쁘지 않다.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벌써 아쉽다.

내일 아침은 세화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가서 일찍 보말 칼국수를 먹고, 숙소 체크아웃을 하고 서우봉과 월대천, 관덕정까지 들러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려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지 알게 해 준 제주.

벌써 다음 제주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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