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6: 올레길 21코스 & 비싼 수업료
1. 혼자 걷는 길은 늘 두려움이 앞섰다.
사람을 만나도, 사람이 없어도 무섭다.
아름다운 길일수록 숲길이 많아 더 그랬다.
제주 올레길, 홀로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던 이유다.
하지만 번번이 피할 수 없어 올레길 여행자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친절한 안내 끝에 알게 된 '아카자봉(아카데미 자원봉사자)' 프로그램.
올레패스 앱을 통해 예약하면 자원봉사자와 함께 걸을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이 보였다.
비록 계획했던 긴 코스들은 눈 때문에 포기해야 했지만, 가장 짧은 21코스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해녀박물관 앞에서 출발하는 것도 큰 메리트였다.
제주 토박이 봉사자님의 짧고 묵직한 설명은 무심코 지나칠 뻔한 풍경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별방진의 숨은 안쪽부터 하도 철새도래지, 토끼섬을 지나 지미봉까지.
그 길 위에서 제주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해녀들이 몸을 녹이는 '불턱(불텅)'은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바다와 가까울 것, 바람을 막을 수 있을 것, 그리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것.
흥미로웠던 건 마지막에 마주한 불턱에는 담장이 없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그 자리에 높은 모래언덕이 있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주었기 때문이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역시 진리였다.
그리고 또 올레길 가이드님 덕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숙소 앞 담장 너머의 풍경의 변화를 알게 되었다.
유채꽃인 줄로만 알았던 그 노란 꽃밭의 정체는 사실 '무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노란색이면 유채라고 생각하지만, 잎이 톱니처럼 깊게 파인 그것은 분명 무였다.
무를 캐내고 남은 자리에서 피어난 꽃들.
구좌의 당근과 무가 왜 유명한지도 비로소 이해했다.
땅이 척박해서 선택지가 없었던 선조들이 어쩔 수 없이 세 가지 작물을 재배했다고 한다.
그저 유채인 줄로만 알고 감탄했던 노란 꽃밭이 사실은 무꽃이었다니.
정체를 알고 나니 내가 알던 풍경이, 내 마음을 뺐어간 그 유채가 무꽃이었다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가끔은 이렇게 기분 좋은 배신감을 주기도 한다. ^^
2. 오늘 제주의 바람은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한창 길을 걷던 도중 걸려 온 렌터카 업체의 전화.
어제 분명 사고 처리를 마무리 지었는데, 갑자기 수리비가 더 나왔다며 100만 원을 추가로 입금하라는 통보였다.
그 순간부터 파도 소리도, 예쁜 벚꽃도, 무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대응'이라는 단어만 가득 찼다.
숙소로 돌아와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아줌마 혼자 대응하기엔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두 시간 가까이 상황과 문제점을 종이에 쭉 써보며 정리해 봤고, 상의 끝에 남편이 전화를 걸기로 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아줌마의 말보다 40~50대 남자의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릴 때가 많다.
한 번 꽂히면 물러서지 않는 그 특유의 고집이 평소에는 답답함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다행히 업체 측도 계약서상 '미정산금 0원'으로 합의된 상황임을 인지했는지, 강압적인 태도 대신 도의적인 부탁조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강압적인 느낌이 있었다면 남편 역시 법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사고 과실과 차량 감가상각을 고려해 30만 원을 추가 입금해 주고 이번 사고를 마무리 지었다.
속은 쓰렸지만, 이번 일을 통해 렌터카 보험 체계와 '완전자차'의 실체를 확실히 공부했다.
"수업료가 참 비싸네."
남편과 통화를 끝내고 쓴웃음을 지었다.
비싼 수업료 덕분인지 오늘 운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멀리 보이는 둔턱조차 미리 피하며 돌아갔다.
제주의 척박한 땅에서 무꽃이 피어나듯, 예기치 못한 사고와 갈등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혼자도 가능하게 된 올레길 걷기,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안전에 대한 경각심.
제주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또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1. 제주 버스의 다정함
종달바당에서 다시 해녀박물관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 안내 화면에 환승 정보가 떴다.
지하철 시스템을 벤치마킹한 것일까.
2. 소주 한 잔의 여유
올레길 위에서 마주친 투박한 메시지 하나.
미안한 마음을 담아 밭주인이 실수로 밭은 간 사람에게 소주 한 잔 올린단다.
척박한 땅을 일구는 노고를 서로 너무 잘 알기에 가능한, 참 다정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