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5: 제주에서의 현지인 체험, 눈물로 배운 '쉼'의 비용
1. 애월 카페에서
오전 내내 참았던 눈물이 이제야 터졌다.
숙소가 아니라 적당히 울어야 하는 카페라서 다행인 걸까, 아니면 이국적인 풍경 속에 나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아 더 서러운 걸까.
아침부터 모든 게 엉망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려 잠시 멈췄던 차를 다시 출발시키던 그 찰나, 둔턱에 걸린 조수석 앞부분에서 굉음이 났다.
차가 힘이 좋았던 건지, 내 발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건지 모르겠지만, 둔턱을 넘어서는 순간 운전대가 제멋대로 돌아갔다. 계기판에는 알 수 없는 경고등이 들어왔고, 이대로는 도저히 운전할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남편의 날 선 잔소리와 큰 아이의 침착한 대처 소리가 뒤섞인 길 위에서, 나는 겨우 버스 정류장까지 차를 몰고 가 가족들을 보냈다.
비 내리는 거리에서 홀로 견인차를 기다리며 맞았던 그 찬바람...
그때는 마음을 추스를 여유조차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견인차는 시내에서 오느라 40분이 넘게 걸렸다.
비를 맞으며 사고 현장을 둘러보던 견인차 기사님이 내민 견적서는 142,700원.
사고도, 견인도 난생처음인 내게 그 금액이 적당한지 따져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눅눅한 기분으로 서둘러 계좌이체를 마쳤을 뿐이다.
견인차에 매달려 끌려가는 차 뒷좌석에 앉아 전화로 렌터카 업체와 사고 처리 비용을 논의했다.
기존 차량은 자동 반납 처리되어 재렌트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견인차가 나를 내려준 낯선 공업사 앞에서 렌터카 예약 앱을 켰지만, 야속하게도 앱은 먹통이었다.
결국 근처 다른 렌터카 업체 화장실로 들어가 노트북을 펼치고 간신히 와이파이를 잡아 예약을 진행했다.
사고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을까.
2만 원이라도 아껴보겠다고 조금 더 저렴하지만 1.2km나 떨어진 업체를 골랐다.
노트북 무게를 짐처럼 느끼며 도착한 그곳의 직원에게 미리 차를 받을 수 있냐고 묻자, AI처럼 무심하게 예약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차가운 대기실에서 40분을 꼬박 견디며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새로 빌린 차를 마주했을 때, 예전처럼 설렘이 먼저 일지 않았다.
기스는 없는지, 휠과 바퀴 상태는 괜찮은지부터 살피는 내 모습이 못내 씁쓸했다.
견인비, 수리비, 그리고 다시 지불한 렌트비까지... 모든 것이 결국 돈이었다.
주식 계좌는 녹아내리고, 휴직 후 남편 눈치를 보며 써야 하는 생활비가 머릿속을 스쳤다.
물론 남편은 나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고 용돈도 따로 챙겨줬지만 아무튼 그렇다.
지난 며칠간 제주에서 어렵게 채워온 여유가 한순간에 휘발되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자본주의에서는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면 뭐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 말이 위로가 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난주 금요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다 떨어뜨렸는데 액정이 나가 있었다.
결국 오늘 수리를 맡기러 서비스센터에 갔다.
수리 시간이 4시간이나 걸린다는 말에 그대로 애월로 왔다.
내가 머물고 있는 숙호 세화와 애월은 정반대였고, 참 달랐다.
바다는 더 역동적이고 흥미로웠으며 거리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엇보다 바다 그 자체보다 카페 천국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나도 그 화려함 속에 섞여 카페 해지개의 한자리를 차지해 보았다.
한옥 문창살을 활용한 인테리어와 소반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만히 앉아 전통적인 향 냄새를 맡으며 이국적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번잡함 속에 있을수록, 역설적이게도 나의 소박한 안식처인 세화가 더욱 간절해졌다.
2. 숙소에서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에서 휴대폰을 받자마자 확인한 부재중 전화 한 통.
JR 언니였다.
남편과 큰 아이가 서울로 올라간 걸 알고는, 혼자 남은 내가 쓸쓸하고 무서울까 봐 전화를 주신 거였다.
그 따뜻한 마음이 고마워 울컥 목이 멨다.
세화 숙소로 돌아오는 길, 렌터카 내비게이션이 내뱉는 길을 잘못 들지 않게 주의하세요라는 경고음이 꼭 나를 향한 따끔한 충고처럼 들렸다. 속도를 최대한 줄여 천천히 달렸다.
공항에서 숙소로 오는 이 길도 벌써 네 번째, 어느덧 눈에 익은 풍경들이 들어오자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드디어 도착한 세화.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마치 집에 온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숙소 현관문을 여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토록 잔소리를 해대던 남편도, 자꾸 엄마를 불러대던 큰 아이도 없는 빈자리가 이토록 외롭고 허전할 줄이야.
현관 비밀번호부터 바꿨다.
남편이 있을 땐 괜찮다가 혼자가 되니 막연한 불안이 두려움으로 바뀌어 밀려왔다.
창밖 너머 무밭은 어느새 밭갈이가 끝났다.
아침에 큰아이가 "엄마는 유채밭부터 무밭 밭갈이까지 제주 농사의 한 시즌을 다 보고 가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제주에는 비가 내린다.
평온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예상을 빗나간 외로움과 사고의 잔상이 나를 괴롭힌다.
제멋대로 돌아간 핸들, 깊게 패인 타이어, 찌그러진 문짝과 깨진 차 바닥...
휴대폰 액정을 고치고, 자동차 사고를 수습하며 보낸 오늘.
이건 단순한 한 달 살기가 아니라, 진짜 현지인 체험이 되고 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다행인 일들도 참 많았다.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았고, 마침 도착한 버스 덕분에 가족들은 제시간에 비행기를 타 일정에 늦지 않게 돌아갔다.
친절한 견인차 기사님 부부와 침착하게 대응해 주신 렌터카 사장님까지. 걸어가면서본 본 초록 보리밭.
복잡했던 비밀번호도 단번에 바꿨고, 지금 창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는 오히려 소란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담장 너머 매끄럽게 갈린 저 무밭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곧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마칠 것이다.
나의 제주도 이 비가 그치면 조금 더 단단하게 피어날 것만 같다.
지금 세화엔, 그리고 제주엔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내일은 해가 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