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아래 무밭

제주 여행 4: 내 것 아닌데 내 것을 빼앗기는 기분

by 멋진여름

오늘도 늦잠은 실패다.

천장의 유리창 속으로 빛이 밀고 들어와 실내가 조명을 켠 듯 환해졌다.

제주에서의 내 스타일대로 느릿하게 아침을 준비하는데, 숙소 돌담 너머 창밖으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한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창가로 다가가 보니 인부들이다.

어제 숙소 앞 유채밭을 가까이서 봤을 때, 분명 '무 머리' 같은 게 보였었다. 눈 수술 후라 시야가 흐릿해 '원래 저렇게 자라는 식물이라 흙이 저 모양으로 자리 잡았겠지' 싶어 사진도 찍어뒀는데, 설마가 사람 잡았다.

오늘 보니 유채밭에 무가 있는 게 아니라, 무밭 사이사이로 유채가 피어났던 모양이다.

베란다 밖으로 나가 보니 아주머니 열댓 분이 무를 캐기 시작했고, 나의 노란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리엔 뽑힌 무들이 나란히 누워 있다.

내 것도 아닌데 내 걸 뺏기는 기분이 들었다.

이 멋진 풍경을 실컷 봤으니 됐다 하면서도 너무 아쉬웠다.

남편과 큰아이가 오늘 밤 비행기로 오니 하루만 지나고 셌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있으니 남자분들도 들어와서 무를 트럭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처음엔 한 대였던 트럭이 나중엔 세 대로 늘어났다.

내 마음이 하나둘 뽑혀 나가는 것처럼 아까워 외출도 못 하고 담장 너머 무밭만 계속 쳐다봤다.

일부러 제주 배경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켜놓고 시선은 계속 무밭으로 왔다 갔다...

낭만이 깨지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숙소 근처까지 작업이 이어지면 유채꽃 한다발과 무 2개를 비용을 지불하고라도 얻을 생각이었는데, 12시가 되니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말도 못 건네보고, 오전 내내 기다린 마음이 허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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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JR 언니가 알려주신 성산 '힘나는 집밥'으로 가자.

투박한 밥집이다. 친구 집에 가서 먹는 밥 같았고, 혼밥 하는 사람이 많이 보였으며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테이블이 가득 찼다.

그리고 반찬 중에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학꽁치 조림이 맛있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단백질도 먹어야지" 하면서 건네주신 계란 후라이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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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후경으로 향한 성산일출봉.

무리하지 않기 위해 입구 언저리만 걸었지만, 그 장엄한 풍광은 여전히 대단했다.

자연의 신비함 앞은 그 어떤 감탄사로도 표현하기 부족하다. 검은 보석 티셔츠를 맞춰 입은 중년 부부 네 커플이 손짓한다.

비슷비슷한 얼굴들을 보니 분명 4자매일 테다.

정성스레 사진을 찍어드리고 마주한 그들의 미소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발길을 돌려 우뭇개 해안으로 내려갔다. 해녀복을 입고 전복회를 써는 모습, 이벤트처럼 펼쳐진 해녀들의 물질 공연이 신기해 한참을 쳐다봤다.

다만, 아름다운 바다 테두리에 밀려든 쓰레기들이 마음을 찔렀다.

다음번엔 꼭 플로깅을 오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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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방문한 오조리 포구. 이미 여러 번 왔던 곳인데, 오늘따라 포구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선명하게 보였다. 왜 저 배경을 이제야 봤을까.

영화를 여러 번 보면 보이지 않던 주인공 뒤의 배경이 보이듯, 익숙한 곳에서 새로 발견한 선물 같았다.

서귀피안 베이커리는 덤이었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3대(친정어머니, 딸, 손녀)가 함께 온 가족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나니 친정엄마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다.

"같이 오자니까..."


숙소에 오니 무 작업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노란 빛이 사라진 자리가 내 마음빛도 조금 침범한 것 같아 일단 숙소에서 나왔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간단히 먹을 것을 사려고 산책 겸 세화 하나로마트로 향했다.

해 지기 전 돌아오려 빠른 걸음으로 나왔는데, 자신만만했던 공간감각이 말썽이다.

길을 헤매었다. 휴대폰 배터리는 거의 다 됐다.

어스름한 세화 해변은 혼자 걷기에 조금 무서웠고, 들고 있는 장바구니는 왜 이리 무거운지.

이 와중에 봄이 보인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를 데리로 공항가는 길에 말을 봤다. 제주는 제주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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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공항에서 남편과 큰아이를 픽업해 돌아오는 길, 시속 30~50km로 천천히 달리는 제주의 밤길을 보며 생각했다.

나에게는 낭만인 이 섬이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현실이겠지.

이제 나의 평온은 깨졌다.

남편은 피곤한지 코를 골며 잠꼬대를 하고 계속 뒤척거린다.

눈 뜨자마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밥 타령을 하는 걸 보니 다음 주 월요일까지 내 평온은 외출 중일 듯하다.

그래도 이번 여행, 내가 누린 이 평온을 그들에게도 조금은 나누어주려 한다.

2026. 03. 26 . 제주 (03. 29. 정리해서 기록)


주의력 부족.

식당에서 탐나는전 카드로 결제하려니 카드가 없다. 차를 2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샅샅이 뒤져도 안 보여 일반 카드를 내밀려는데 입고 있던 남방 주머니에서 발견했다.

아주머니가 여러 번 왔다 갔다 한다며 웃으신다.

베이커리에서도 똑같았다. 또 차로 뛰어가 한참을 뒤졌지만, 카드는 여전히 내 주머니 속에 있었다.

게다가 탐라는전을 충전하기 위한 은행 인증 시스템까지 말썽이다.

고객센터에서 30분 가량 은행 인증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단다.

오늘 '주의력 부족' 주의보라도 내린 모양이다.


[실시간 제주 벚꽃 현황] 2026. 03. 28. 직접 확인

제주 시내 (삼성혈, 전농로 벚꽃 거리): 이제 막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한 상태 (개화 초입)

시내 → 중문 이동 구간: 개나리는 만개한 곳이 많으나, 길가 벚꽃은 듬성듬성 피어나기 시작함

서귀포 예래 생태공원: 20% 정도 개화. 산책로는 24시간 개방이나 가로등이 없어 야간 방문 시 주의 필요

중문 벚꽃길: 식당가나 가로등 근처 온도가 높은 구간 위주로 40~50% 정도 개화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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