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혔지만, 오히려 좋아

제주 여행3 비오는 제주에서 숙소에 갇혔다

by 멋진여름

어제 저녁부터 오늘 오전 내내 비가 내렸다.

계획대로라면 일찍 채비해 시장 구경도 하고 세화 해변을 거닐었어야 했다. 하지만 하늘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고, 나는 숙소 식탁에 멈춰 섰다.

창 밖을 보는 순간,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통창 너머 흔들리는 노란 유채꽃 물결. 비현실적일 만큼 선명한 그 색감 앞에 서니 "오히려 좋아"라는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때로는 궂은 날씨가 길을 막아설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

멈춰 서야만 만날 수 있는 선물 같은 순간.

갇혀서 좋은 '오히려 좋은' 반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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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멀리스트답게 소금과 기름까지 야무지게 챙겨온 덕에, 나만을 위한 근사한 브런치를 차려낼 수 있었다.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는 그 짧은 과정 속에서 문득 '사람 한 명 먹고사는 일이 참으로 복잡하고 부산스럽다'는 생각이 스쳤다.

옷도 입지 않고, 쓰레기도 남기지 않으며 자연에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 동물들에 비하면 인간은 참 많은 빚을 지고 산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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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잦아들길 기다리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다, 이대로 하루를 보내기 아쉬워 세화 오일장으로 향했다. 5일과 10일, 5배수의 날에만 열리는 그 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습게도 소금과 기름은 챙겼으면서 정작 우산은 챙기지 못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숙소에 갇혀 있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제주의 변덕스러운 다정함이라 여기기로 했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쨍하게 났다.

시장에서 줄 선 호떡집을 구경하고, 떡볶이와 튀김으로 허기를 채웠다.

유난히 맛이 좋았던 그 튀김 앞에서 '나중에 우리 가족 다 같이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다.

숨비소리길을 따라 플리마켓으로 향했지만, 비 소식 때문인지 문은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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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글라스와 모자 없이 쏟아지는 햇살을 감당하기 버거워 잠시 숙소로 돌아와 숨을 골랐다.

유튜브로 '왕사남' 관련 영상 몇 개를 찾아보며 시간을 보내다, 다시 별방진으로 산책을 나섰다.

성곽 위에 올라 바라본 하도 바다는 참으로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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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보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까웠다.

길가에서 다정하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은퇴한 부부들의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남편이 생각났다.


산책길, 이어폰을 꽂았으나 이내 빼버렸다.

열 걸음도 채 걷기 전에 파도 소리가 그 어떤 음악보다 지금과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곳 숙소는 웬만한 카페보다 훌륭한 조망을 가졌다.

그리고 늦잠을 허락하지 않는 풍광, 불을 켜지 않아도 온 집안을 가득 채우는 빛.

이 평온함이 내 마음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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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혔지만 너무 좋은 시간이었던, 제주의 하루였다. 26년 3월 26일에




다른 이들의 글을 읽다 내 글을 본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넘쳐흐른다. 이제는 조금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오늘 하루 찍은 사진들을 보며 마음을 정리해 본다.

버릴 것 하나 없이 여전히 너무 좋아서, 무엇을 지워야 할지 한참을 망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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