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 2. 그래 욕심대로 해보자
어제저녁, 기어이 차를 돌려 편의점에 다녀왔다.
설레는 마음 한편으로 사당역에서 둘째와 날 선 상처를 주고받으며 헤어진 기억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묘하게 뒤섞인 감정 탓에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눈 때문에 술은 금지였지만, 도저히 맥주 한 잔 없이는 안될 것 같았다.
결국 차를 돌려 기어코 사 온 맥주 한 캔으로 마음을 억지로 눌러 앉혔다.
이번 여행은 나의 '욕심'을 테스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민되는 짐은 일단 무조건 챙기고 봤다.
내 느낌에는 18kg 정도겠거니 했는데, 막상 수하물을 부치려니 카운터에서 다음에는 이렇게 꽉 채워오시면 안 된다고 해서 보니 22.7kg. 허용된 수화물 무게를 가볍게 넘겼다.
내 어깨 위 숄더백에는 스카프와 노트북이, 등에는 또 다른 작은 배낭이 매달려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보니 가관이다.
상의 9벌, 바지 6벌, 점퍼 2벌, 모자 3개...
여기에 내 멋과 낭만을 더하겠다며 선물 받고 아껴둔 블루보틀 머그컵과 번쩍이는 케이스가 근사한 바샤 커피까지 챙겨 왔다.
하지만 오늘 세화 해변을 걷다 갑자기 흐려진 하늘을 보며 깨달았다.
정작 필요한 우산은 빼놓고 왔다는 것을.
겉치레와 과욕에 눈이 멀어 본질을 놓친 결과였다.
그림 같던 숙소는 금세 맥시멀리스트의 살림집으로 변했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창가에 놓아둔 찻잔과 그 향기에서 잠시나마 마음을 달래 본다.
바차 커피, 내 입맛에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맛이지만 번쩍이는 케이스만큼은 제 역할을 다하며 나를 위로한다.
숙소 천장의 유리창은 강렬한 아침 햇살을 들이는 자연 알람이었다.
불을 켜고 잔 줄 착각할 만큼 환한 빛, 그야말로 '자연광 맛집'이다.
더 잠을 청할 수 없어 오전 8:30경, 구좌 하나로마트로 향했다.
구좌에 왔으니 당근을 사고, 평소 즐기지 않던 군고구마도 홀린 듯 장바구니에 담았다.
'제주'라는 글자가 적힌 물건들을 쫓으며 장을 보는 행위 자체가 여행자의 특권이자 즐거움이었다.
조금 늦은 아점 메뉴는 해물 라면.
지난번엔 못 본 것 같은데, 게다가 아침에 라면? 제주니까... 하는 마음으로 골랐다.
해물을 씻을 때 올라오는 비린내에 잠시 후회했지만, 야외 테이블에 앉아 유채꽃을 바라보며 따뜻한 국물을 넘기는 순간 그 후회를 다시 후회했다.
비린내를 날리려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키는 수고로움조차 이 풍경 안에서는 기꺼이 괜찮았다.
숙소에서 세화 해변까지 왕복 1시간 25분을 걸었다.
누구에게 맞출 필요도, 말을 보탤 필요도 없는 시간.
장녀로 태어나 늘 가족 틈에 있었고, 결혼 후에도 줄곧 누군가와 함께였던 나에게,
진정한 혼자가 된다는 그 자체가 어색하고 낯설다.
나를 마주하겠다고 나섰는데 나 자신과의 시간이 어색하면서도 오묘하다.
구좌의 당근 주스와 당근 케이크가 간절해 카페 한라산을 찾았었다.
하지만 입구의 고양이와 공간을 채운 냄새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본래 고양이를 싫어하고 무서워했었다.
그러다 작년에 동료의 고양이 사진과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큰아이가 워낙 좋아하니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일뿐인 상태까지 왔다.
주말에 큰 아이가 오면 함께 다시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옮겼다.
혼자 걷다 보니 다시 가족 생각이 머문다.
남들에게는 그토록 너그러우면서 왜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는 그러지 못했을까.
냉랭하게 돌아서던 둘째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아리고 쓰라리다.
한없이 사랑을 주셨던 부모님을 떠올리며 나의 엄마로서 자질을 돌아본다.
하지만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에게 약이 될 때가 있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한다.
지금은 일단 마음을 접어두고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기로.
이기적인 엄마라 자책하면서도, 눈앞의 유채꽃 풍경에 따뜻하게 위로받는 이 순간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다.
제주의 길은 풍경을 쫓느라 내가 가야 할 곳이나 숙소 입구를 자꾸만 놓치게 만든다.
5분 거리를 20분 걸려 돌아가면 좀 어떤가.
이제는 속도를 줄이고, 바람 소리 같은 세화의 파도 소리에 이 복잡한 마음을 잠시 맡겨두려 한다.
큰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사준 신발을 신고 걷는 제주의 길, 감회가 참으로 크다.
이 글을 쓰는데 2시간 전쯤부터 창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난다.
온 방 문을 다시 한번 닫고, 창문을 확인하는데 비가 온다.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