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아트스쿨 : 정우철 도슨트 강연 후기(1)

1강: 예술의 존재 이유

by 멋진여름

휴직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시간의 주권'을 되찾는 일이다.

출근하던 시절, 현관문을 나서기 전 1분의 어긋남에도 전전긍긍하며 마음을 졸이던 조급함이 이제는 없다.

대충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내 속도대로 움직여도 되는 자유.

그 자유로운 시간 속에 나는 오늘, 아주 사치스러운 강연 하나를 끼워 넣었다.

종로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도슨트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정우철 도슨트의 강연이 있는 날이다.

내가 사랑하는 마이아트 뮤지엄에서도 늘 시간이 맞지 않아 놓쳤던 그의 해설을, 이번엔 휴직 덕분에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됐다.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보는 것은 정말 좋아한다.

영화관 가자는 말엔 시큰둥해도 미술관 가자는 말엔 눈이 번쩍 뜨인다.

1시간 30분으로 예정된 강연은 10분이 연장되었지만, 내게는 마치 10분처럼 짧게 느껴졌다.

강연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우리나라 그림 중 가장 비싼 그림 이야기로 포문을 열 시카고 미술관에 있는 쥘 브르통의 <종달새의 노래>로 이어졌다.

배우 빌 머레이가 절망의 끝에서 자신을 살렸다고 고백한 그 그림.

인간의 마음을 조용히 일으켜 세우는 예술의 힘을, 정우철 도슨트는 그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전해주었다.

강연자는 그림의 유명세나 가격보다 작품이 어떻게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중심으로 강연하셨다.


"미술관은 명작을 거는 곳이기도 하지만, 명작을 만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 한마디가 내 마음속 미술관에도 깊이 내려앉았다.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를 직접 봤었는데, 당시에도 그 거대한 여운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오늘 강연을 들으니 그때 더 깊이 그 작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림 속 배경에 숨겨진 용서하는 자와 용서하지 못하는 자, 그리고 후회하는 자의 시선을 그때 알았더라면. 헨리 나우웬 신부가 왜 이 그림 앞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리 공부하고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 아쉽다.


뭉크의 이야기도 새로웠다. 노르웨이 공항에 내렸을 때부터 만났던 <절규>는 작년 예술의 전당 전시에서도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지만, 오늘부터는 그의 <태양>이 더 소중해질 것 같다.

작년에도 공부는 하고 갔었지만 그때는 절규가 원픽이었는데, 오늘 바뀐 것이다.

노르웨이 지폐에 새겨졌던 그 태양이 그려지게 된 배경을 알고 나니, 뭉크의 고통 너머에 있던 찬란한 희망이 비로소 보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화가는 그랜드마 모지스였다.

사실 그녀의 그림은 전문적인 기교로 따지자면 '못 그린 그림'일지도 모른다.

이 강연을 듣기 전에 본 적이 있는데 그냥 밝은 느낌 그림일 뿐인데 왜 이렇게 유명하고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그림이지 이런 생각은 했었다.

실제로 그녀의 그림은 명암도 없고 구도도 서툴러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 같다. 하지만 그 속엔 따뜻함과 행복이 가득하다.

평생 가난 속에서 노동하며 살다 바느질을 할 수 없게 되자 동생의 권유로 76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고, 80세에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고 한다.

그리고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고 100세에 뉴욕시에서 생일 파티를 해준 그 삶의 궤적이 그림보다 더 예술적이었다.

백악관이 그녀의 그림을 소장한 이유도 아마 그 '기분 좋은 예술'의 힘 때문일 것이라고 강연자는 말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다음 주 목요일이 벌써 기다려진다.

그림이 처음엔 그저 색감에 끌렸고, 그다음엔 정교한 묘사에 감탄했다면, 이제는 그림 뒤에 숨겨진 화가의 삶과 예술성에 마음이 움직인다.


4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페르난도 보테로전이 다시 열린다고 한다.

몇 년 전 유쾌하게 관람했던 기억이 있지만, 이번엔 좀 더 공부하고 가야겠다.

게다가 정우철 도슨트도 참여한다고 한다. 운 좋으면 이 훌륭한 도슨트를 또 들을 수 있다.

강연자가 일러준 대로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볼 생각이다.

역시, 예술도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

나의 이 사치스러운 휴직 기간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배경지식으로 채워지고 있어 참 행복한 목요일이다.


커버 이미지는 절망의 끝에서 마주한 빛, 뭉크의 <태양>이다.

작가의 이전글비 내리는 제주의 작별 인사, 벚꽃 엔딩은 집 앞에서